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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키포키 May 01. 2023

정신적 마동석 되기

새 달의 첫날에는 수영장에 새로 온 사람들이 많다. 쭈뼛거리며 샤워장으로 걸어 들어오는 사람은 슬며시 곁눈으로 보게 된다. 벌써 수영장에 다닌 지 11개월 되었으니 나 정도면 어느 정도 여기 룰에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오늘도 누군가 마른 몸에 곧장 수영복과 수모를 걸치고 위로 물만 훌훌 뿌린 다음 수영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제대로 비누칠 샤워하라고 한 소리 하고 싶어서 속이 답답하다. 비누칠을 하지 않는 것보다 샤워장에서 남을 쳐다보고 있는 게 더 실례니까 그러지 않았다. 어느 아줌마라도 보아서 한마디 한다면 내 속이 시원할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저번 달에는 머리가 허리춤 정도 오는 젊은 애가 첫날 안 씻고 들어가다가 아줌마들에게 역시나 한 소리 듣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바로 다음 강습날에 하도 긴 머리는 눈에 띌 수밖에 없었는데 그날은 열심히 씻고 있었다. 해야 할 말은 하고 살아야겠다 하고 날이 갈수록 나도 점점 낯이 뻔뻔해지는데 그 뻔뻔하게 한 소리 하고 싶은 대상은 매번 젊든, 나이 들든 같은 여자다. 말하면 씨알이라도 먹힐 것 같아서 그러나 보다. 만일 누구에게 한마디 하고 싶어지면 저 사람은 마동석이라고 생각한다. 마동석에게 제대로 비누칠하고 씻고 들어가라는 말 절대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여자애들한테도 말하지 않아야 한다.


내가 다니는 수영장에는 샤워장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큰 샤워장이고 하나는 작은 샤워장이다. 작은 샤워장은 수영장에 들어가는 곳과 입구가 붙어있어서 수영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주로 이용한다. 아줌마들은 거기서 수영을 끝내고 나온 누가 씻고 있으면 한 소리한다. 나도 한 번 여기는 들어가는 사람들이 씻는 곳이라고 한 소리 들었다. 그때 좀 짜증 나서 대꾸도 안 했다. 나도 들어갈 때에 저쪽 큰 샤워장에서 주로 씻을 때가 많았는데, 뭐 그런 것까지 룰이라고 만들어서. 어디든 자리 나면 씻으면 그만이지. 남한테 피해 준 것도 아닌데 대체 뭐라고 지적질이야. 누가 그 샤워장 씻는 걸로 한 소리 듣는 모습 또 보았는데 마음 아팠다. 알몸으로 씻고 있는데 옆에서 잔소리하면 수치심 든다. 그 사람은 그러고도 다음 날 또 거기서 씻었다. 대적해 봤자 이 평생 한소리하고 싶어서 병이난 사람의 마음이 결코 사라질 것도 아닌데 그 사람은 또 알몸으로 한소리 들었다.  


남편이 같은 수영장 다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좀 했었다. 남자들도 남한테 한 소리하냐고 그랬더니 애초에 그런 것 남이 어쩌고 있는지 신경 안 쓴 댔다. 그럼 다들 비누칠도 제대로 안 하고 수영하냐고 버럭 하니까 그건 모르겠고 자기는 잘 씻는다고 그랬다. 먼저날에 아줌마 한 명이 비누칠을 하지 않은 건지, 옆의 아줌마가 그걸 보고 비누칠하고 들어가라고 했더니 맨 몸에 멱살 잡고 싸우는 꼴을 볼 뻔했다. 그 비누칠 안 한 아줌마가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야?”하고 소리를 크게 질렀다.


범법을 하는 것이 아니고서야 자기가 룰을 지킨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룰을 지키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만일 마동석이 그런다면 그에게 룰을 지키라고 요구할 용기내기 쉽지 않을 거다. 마동석에게는 하지 못할 강요라면 상대를 얕잡아보는 거다.      


그렇지만 수영하기 전에 비누칠은 하고 들어가는 게 맞다. 왜냐하면 수영하면서 물을 많이 먹게 되니까. 수영 시작 전에 모두 깨끗하게 샤워해 줬으면 좋겠다.




오늘은 월요일이라서 오리발수영을 했는데 오리발 없는 신규회원 남자 두 명이 우리 레인에서 수영했다. 우리 레인이 나이대가 있으니 느리다고 그리로 보낸 것이었다. 그들은 수영할 때 맨발로도 오리발을 따라잡을 만큼 빨랐고 그만큼 금방 헥헥거렸다. 수영 끝나고 아줌마들이랑 남자애가 말하고 있는데 아줌마들 표정이 너무 환해서 아들인가? 생각하며 가까이 헤엄쳐갔다.


“오늘 재미있었어? 어땠어?”

남자애가 머뭇머뭇하니까

“다음번엔 우리랑 같이 수영 안 해주고 저쪽 레인으로 갈 거지? 그치?” 했다.

그러니까 그 남자애는 머쓱해하며 웃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는, 아니다 내내 같이 수영하면서도 아직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저 남자애한테 오늘 하루 만나고 저렇게 환한 미소와 애교 섞인 살가운 애정을 먼저 보여줄 수 있는 걸까. 나한테는 한 달 내내 접영 할 때 “가세요” 한마디만 했으면서.


무언가 빼앗긴 억울한 심정을 느꼈다는 것은 아니다. 만일 내가 아저씨들과 함께 수영하는데 아저씨들이 오늘 아줌마들이 총각에게 한 것처럼 나에게 대한다면 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 같다. 욕구도 분노도 드러내는 사람만 솔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솔직해질 수 없다면 위계에 놓이는 것이니까.


그들의 그런 솔직한 마음 표현이 놀라울 뿐이었다. 젊은 여자애들에게 그런 모습은 극히 보기 힘든 것이니까. 학교 다닐 때 그런 여자애들이 학번 당 한 명 정도 있었는데 그 애는 반드시 유명인이 되었다. 나타나면 여자애들 사이에 빨간 사이렌으로 경계경보가 울렸다. 또라이 등장. 또라이 등장.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 또라이들 그냥 솔직했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누구에게 그렇게 대놓고 드러내며 좋아서 미치겠는 기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아니 누구에게 그런 맘을 느낄 수나 있을까? 이따금 산책하는 강아지들을 보면 나는 그 강아지가 나를 봐주었으면, 혹시나 내 정강이에 젖은 코를 갖다 대 주었으면 하고 안달을 하지만 그 외에 내가 가진,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털어놓기는 남사스러운 욕망에 대해서라면 내 느낌조차 전혀 모르겠다.


징그럽게 왜 이러세요?

남이야 씻든 말든 무슨 상관인데요?


그런 말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게 되는 날에는 아무도 나에게 솔직한 마음 드러내지 않고 슬며시 나를 피해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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