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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카 친구 Aug 01. 2021

키케로라는 변호사가 전쟁에  뛰어드는 자세

로마 제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제국의 기틀을 다지고 느긋해지던 노년의 일이다. 손자가 키케로의 책을 읽다가 들켰다. 당대의 어린아이도 아우구스투스가 내전 끝에 제위에 올랐고, 그 흐름 속에서 키케로가 황제의 묵인 아래 죽임을 당했다는 정도는 알았을 것이다. 황제는 손자의 손에서 키케로의 책을 받아 훑어보고는 “교양 있는 사람이었단다. 애국자이기도 했지” 말하고는 책을 돌려주었다.


플루타르크가 <영웅전>에서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삶을 압축하는 장면으로 이 에피소드를 넣은 것은 키케로나 아우구스투스보다도 플루타르크의 재능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정작 키케로의 위상을 드러내는 것은 플루타르크라는 후대의 역사가가 로마 건국의 아버지 로물루스부터 제국의 기틀을 세운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이르는 쟁쟁한 장군들 사이에 문인 키케로를 나란히 세웠다는 점이 아닐까.

 

게다가 영웅전에서 흥미진진한 부분은 청년이 영웅이 되는 과정 아닌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꺾어 이름을 세웠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해 위인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키케로의 발판은, 변호사로서 정말 열심히 일했다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문민정부에 들어선 이후 변호사 출신 대통령을 두 명이나 배출했고, 판사나 검사 출신 대선주자도 없지 않았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법에 통달한 법률가가 정치판에 뛰어드는 것은 어색하지도 않다. 하지만 키케로가 성장한 시대는, 법치주의를 만들었다는 로마이기는 하나, 사람을 목재처럼 사고팔고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면 광장에 목이 내걸리던 고대였다. 그런 시대에 키케로는 군사력은커녕 본인 체력도 변변치 않았으면서, 아버지 세대까지 정계엔 발도 들여본 적 없는 평민 처지에,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면 고위 귀족과 전쟁영웅들과 같은 무대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Marcus Tullius Cicero, detail of a marble bust; in the Capitoline Museums, Rome. © AISA—Everett/Shut


소설 <위대한 개츠비>에서 어린 개츠비가 일일 계획표를 세우고 악착같이 공부를 했던 것처럼, 키케로도 자기 주도 학습에 철저하다 못해 가진 것은 말발뿐임을 진즉에 깨닫고 웅변술을 배우러 그리스 거장을 찾아다녔고, 위장이 약해 많이 먹지도 못하면서 목소리만은 강하고 듣기 좋게 만들려 훈련을 거듭했다.


로마에 자리 잡은 이십 대 청년 변호사 키케로는 온갖 사건을 맡았다. 당시 최고의 변호사는 법정을 사로잡는 화려한 화술의 대가 호르텐시우스였다. 호르텐시우스가 대기업 클라이언트를 맡기도 바쁜 대형 로펌의 원탑 파트너라면, 키케로는 승률은 좋지만 개인 의뢰인 사연을 듣느라 날밤을 새며 절치부심하는 1인 변호사 사무소 같지 않았을까.


키케로가 스물여섯이던 해, 드디어 그의 이름을 알릴 소송이 들어왔다.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라는 지방 유지가 부친 살해 혐의를 받고 키케로에게 변호를 맡긴 것이다. 사건을 조사한 키케로는 해방노예 크뤼소고누스가 로스키우스 집안의 재산을 노려 섹스투스의 부친을 제거하고는 섹스투스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제는 크뤼소고누스가 당대 최고 권력자 술라의 부하였다는 것이다.


기원전 80년 당시는 평민파 마리우스와 귀족파 술라의 내전이 끝나고, 술라의 보복이 로마를 휩쓴 직후였다. 술라는 숙청부 명단에 오른 ‘국가의 적’은 누구나 즉결 처형할 수 있다고 명했다. 신속하게 정적들을 제거할 수 있고, 정적으로부터 몰수한 재산은 짜고 치는 경매를 통해 내전 동안 고생한 부하들에게 안겨줄 수 있다는 점에서 영리한 전략이었다. 그 피해자가 적국이 아닌 같은 로마 시민이라는 것이 당대에도 잔인하게 여겨졌지만. 그 과정에서 부하들이 은근슬쩍 엉뚱한 이름을 숙청부에 올리고, 술라가 이를 묵과한 것도 짐작할 만한 일이다.

 

키케로가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를 변호하려면 부친을 숙청부에 올리고 재산을 경매로 사들인 크뤼소고누스를 공격하지 않을  없고,  재판을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이 이를 술라에 대한 공격이라고 느낄 것이 뻔했다. 가문도 한미하고 변변한 직함도 없는 청년 변호사 키케로를 잡아 죽이는 것은 술라와  일당에게 해적선 하나 잡는 것만큼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키케로는 로스키우스 사건을 맡아 훌륭하게 변호했고, 결국은 무죄 선고를 받아냈다. 그의 변론은 적당히 압축해서 미국 법정영화에 집어넣어도 하이라이트 장면으로 꼽힐 정도로 훌륭했다.


키케로는 어차피 재산 일체를 상속받을 섹스투스 로스키우스가 부친을 살해할 이유가 없었음을 논변했다. 현대까지 유효한 로마법 격언 “Cui bono?”(“누구에게 이득인가?”)를 상기시키며, 자칫 재산관계에 가족 간의 애증이 복잡하게 얽혀들 수 있는 사건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하나의 의문으로 요약한 것이다. 그리고는 로스키우스의 재산이 경매에서 헐값에 처분된 경위를 조목조목 짚으며 그 과정에서 크뤼소고누스가 권력을 남용했다고 지적했다. 키케로는 '고귀한' 술라는 부하의 만행을 몰랐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로마에서 더 이상 자국민에 대한 잔인함을 용납해서는 안된다고 외치며 변론을 마무리했다. 누구 들으라고.


변호사가 법과 논리를 무기처럼 휘두르며 재판정이라는 전투에 나설 ,  승패를 가르는 것은 경기장에 흘리는 피가 아니라 판정을 내리는 사람의 마음이다. 키케로는 조리있게 얘기하면서도 듣는 사람 마음에 불을 지르는데 탁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앞에서 “이런 잔인함" 사람들이 “많은 불운에 단련되어 더는 동정심을 갖지 못하게 만든다는 점에서도 악한 "이라고 외친 키케로나, 그가 실제로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는 것은 로마법을 공부하고 싶게 만드는 빛나는 지점이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지만 막상 펜을 들고 칼에 맞서기는 겁나는  아닌가.

섹스투스 로스키우스 사건을 모티프로 한 역사 추리소설. 젊은 변호사 시절 키케로가 등장하는 소설은 별로 보지 못했던 터라 쏠쏠하게 재미있었다.


핀테크 스타트업의 1 법무팀으로 일할 , 법에 대해 생소한 직원분들을 상대로 법의 기초에 대해 간단한 강의를  적이 있다. 내가 던진  질문은 “법률가, 개발자, 마법사의 공통점이 무엇인가였다. 내가 생각한 답변은 “  언어의 힘을 믿는다 것이었다. 마법사는 자연의 신비한 힘을 주문에 담고, 개발자는 ( 눈에는 마법과 다를  없는) 코딩으로 기술을 쌓아 올리고, 법률가는 사람들의 의지로 만들어  법의 힘을 믿는다. 사람과 사람이 맺은 약속의 언어에 사회를 이끌어가는 힘이 있고,  힘으로 무력이나 재력 같은 다른 힘에도 맞설  있다고 믿는 것이다.


키케로는  믿음으로 로마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권력 다툼 한복판에 뛰어들었. 그리고 그는 전투의 승패를 거듭할지언정 마지막 순간까지  믿음을 버리지 않았던  같다.


로스키우스 재판으로 유명세를 탄 키케로는 가문 최초로 원로원에 입성했고, 정치적 입지를 차차 넓혀나갔다. 마침내 마흔셋의 나이에 로마 공직 최고의 직위인 집정관이 되었고, 한때 “국가의 아버지"라고 불린 적도 있다. 그 과정에서 법률가 키케로는 유능했다. 부패한 시실리 총독 베레스를 공격하고 베레스를 변호한 호르텐시우스까지 이겨낼 때는 정의로웠다고 단언하기 쉽고, 정적 카틸리나를 상대로 원로원에서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 인내를 남용할 것인가?"라고 탄핵하고는 반란 주동자를 재판 없이 사형에 이르게 했을 때는 애매했지만, 로마법의 수호자를 표방하며 연설을 토할 때 그는 가장 빛났다.

  

정치인 키케로의 공과는 좀 더 복잡하다. 그는 허세와 야심으로 어디 가서 뒤지지 않았건만, 술라의 뒤를 이은 최고 권력자 카이사르의 동맹 제안을 거절했다. 공화정을 해치는 독재에 참여할 수 없다며 말이다. 덕분에 망명할 정도로 밀려났다가,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후에는 국가의 어른을 바라는 여론 덕분에 정치적 입김을 회복했지만,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자신에게 감화되어 독재 대신 공화정을 택할 것이라고 짐작해버렸다. 그 짐작으로 옥타비아누스의 적인 안토니우스를 신랄하게 공격했건만,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적당히 화해했고 키케로는 마침내 숙청을 당하기에 이른다. 키케로가 보여주는 신념과 순진함의 양면은 법률가 출신 정치인의 한계인가 싶기도 하다.


다만 문인의 승패는 목소리의 힘으로도 재야 하지 않나. 그 부문에서는 시대를 넘어 키케로의 승리가 명백하다. 안토니우스는 후세의 펜촉에 따라 노련한 연설가도 되었다가 무식한 난봉꾼이 되기도 한다. 옥타비아누스는 국가 제도에 이름을 담았지만 사람으로서 그의 인생은 어떠했는지 알기 힘들다. 반면 키케로는 정말 많은 글을 남겼다. 말이 하도 많아 그의 비서이자 노예였던 티로가 속기술을 만들었을 정도다.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법률과 국가와 신과 우정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그의 목소리가 글을 읽는 내 귀에 쟁쟁하다.


사회를 향한 언어의 힘을 믿는 것이 법률가라면, 키케로라는 변호사가 인생을 걸었던 패기를 역사가 인정해 주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참고자료

Plutarch, "The Life of Cicero." The Parallel Lives

Balsdon, J. P.V. Dacre and Ferguson,. John. "Cicero." Encyclopedia Britannica, February 14, 2021. https://www.britannica.com/biography/Cicero.

Wikipedia contributors, "Cicero, " Wikipedia, The Free Encyclopedia, https://en.wikipedia.org/w/index.php?title=Cicero&oldid=1035216122 (accessed August 1, 2021)

키케로, 설득의 정치, 김남우 외 옮김 (민음사, 2018)


커버: cut from <Cicero Denounces Catiline>, fresco by Cesare Maccari, 188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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