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두 시쯤 일이 끝나고 나면 자유 시간이다.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나는 곧장 앞치마를 벗어 세탁물 수거함에 넣어둔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 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낸다. 일기를 쓰거나 가볍게 사이클을 탈 때도 있지만, 주로 책을 읽는다. 만화책이나 옛날 잡지를 볼 때도 있다. 저녁은 잘 먹지 않는다.
종종 K가 찾아온다. 그는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특히 팽창기 정치사가 그의 전공이다. 팽창기는 20세기 중반부터 21세기말 까지를 지칭하는 그들의 용어다.
"저는 언제나 우주선 속에서 무중력을 이겨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라이카를 묘사하면서 수업을 시작해요."
역사 이야기를 할 때 K는 언제나 두 눈을 반짝인다. 나는 그에게 ‘20세기 오타쿠’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는데, K는 그 별명을 썩 마음에 들어 했다. 오타쿠라는 말은 이미 사어 (死語)가 된 지 오래였고, 그래서인지 고풍스러운 맛을 풍기는 단어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K가 방문하는 날은 저녁을 먹어야 한다. K는 항상 두 손 가득 먹을 것을 들고 온다. 익숙한 솜씨로 냉장고에 음식을 채워 두고는, 빵과 수프, 고기 같은 것들을 식탁 위에 보기 좋게 깔아 놓는다. 그리고 매번 재배지가 다른 와인을 가지고 온다.
나는 태생적으로 술을 못하지만, K의 성의를 보아서 한 잔은 마시는 편이다. K는 자신이 가져온 와인이 20세기의 유명 와인들에 비해 어떤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나는 와인을 거의 마셔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궁금증을 풀어주지 못한다.
K는 파티와 연회를 좋아한다. 우리는 음식을 먹고 (주로 K가 먹는다), 와인을 마시며 (주로 K가 마신다) 이야기를 나눈다. 이야기는 자정이 될 때까지 이어질 때도 있다. 모임이 끝나는 순간은 자연스럽게 결정된다. ‘포만감’ 있게 대화가 진행되었다는 느낌이 들면, K는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네고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면 나도 청소용 로봇에게 뒷정리를 부탁해 두고는, 침대에 바로 몸을 누인다. 대개는 바로 잠이 든다. 나는 곧장 선희의 꿈을 꾼다.
꿈은 매번 동일하게 시작해서, 동일하게 끝난다.
나는 벚꽃이 피는 계절의 늦은 밤, [케틀 렌치] 앞에 서서, 오지 않을지도 모를 선희를 기다린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술집들도 하나둘씩 문을 닫을 정도로 늦은 시간이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벚나무에서, 설익은 벚꽃 잎이 흐드러지며 떨어진다. 나는 고개를 들어 가로등 불을 배경으로 떨어지는 꽃잎을 감상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초조해진다. 점점 귓가에서 울리는 소음이 잦아들고, 눈이 침침 해진다. 적막하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처럼. 색이 바랜다. 마치 모래에 파묻힌 도시처럼. 나는 소리와 색이 사라진 골목에 서서, 그녀를 기다린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선희다.
그 순간 거리의 모든 것들이 소리와 색을 되찾는다. 나는 천천히 시선을 이동시킨다. 벚꽃 잎을 지나, 가로등을 지나, 작은 술집들이 조밀하게 모여있는 대학가의 위태로운 골목길을 지나, 큰길에서 골목으로 꺾어 들어오는 모퉁이에 서서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선희를 본다.
나는 눈물을 닦기 위해 올린 손을 그대로 머리 위로 치켜들어 그녀를 향해 흔든다.
선희는 나를 향해 뛰어온다. 아니 걸어온다. 나는 그녀의 걸음걸이와, 흔들리는 팔과, 쌀쌀한 봄바람을 막기 위해 목에 두른 스카프와, 머리를 감싸고 있는 검은색 야구모자를 눈에 담는다.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해서 짧게만 느껴진다. 잠깐이지만, 그녀가 영원히 내게 닿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제 때 닦아내지 못한 눈물이 눈두덩이에 고인다. 나는 눈물을 도로 눈으로 삼키기 위해 고개를 든다. 그 순간,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며 '케틀렌치'의 네온사인 간판이 내 머리 위로 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