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선희의 아주 먼 후손이다. 놀랍게도 그는 선희가 썼던 물건들을 갖고 있다. 처음 그와 따로 만났을 때, 그는 마치 고고학자가 고생물 알 화석을 만지는 것 같은 정교하고 세심한 손놀림으로 선희의 노트북을 내 앞에 올려 두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가 있었다. 물론 하나같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물건들이고, 대부분은 (정확히 말하자면 모든 것들이) 내가 사고를 당한 후에 선희가 사용한 것들이다. 내게 익숙한 물건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에 잃어버린 일기장을 되찾은 사람 마냥 노트북과 선희의 사인이 들어간 책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 뒤로 K는 틈만 나면 나를 찾아온다. 우리는 일종의 공생관계를 형성했다. 나는 K에게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생활상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상아탑의 세례를 받고 있는 K에게 사료는 차고 넘쳤지만, (인류는 진공관의 발명 이후, 손이 미치는 모든 것들을 게걸스럽게 디지털 정보로 변환시켰다) 나의 증언은 그의 연구에 생동감을 더해주었다. 한편 K는 나의 개인 사서이자 교습 선생으로, 내가 4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무사히 사회에 안착하여, 남은 삶을 견뎌낼 수 있도록 돕는다.
어떤 연유로 내가 다시 의식을 되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나는 초저온으로 설정된 부동액에 보관되어 있었다. 평소대로 수명 업무를 진행하던 직원이, 내 바이탈 신호의 변화를 감지했다. 나는 그들이 제대로 대응할 틈도 없이 깨어났다. 다시 의식을 차렸을 때 희미하게 느껴지던 웅성거림이 지금도 기억난다.
나는 긴 꿈과 짧은 깸을 반복했다. 나는 꿈을 꿀 때 더 자세히 보고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무한하게 반복되는 선희를 보았다. 그녀가 흔드는 손. 다가오는 발걸음. 꿈속에서 나는 다시 꿈을 꾸었다. 그녀와의 첫 만남. 아르바이트 면접을 보기 위해 앉아 있던 선희와, 그녀에게 커피잔을 내어주는 나의 떨리는 오른손. 몇 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그 위에 포개어졌던 그녀의 손과 입술.
“정신이 드시나요? 제 목소리가 들리실까요?”
그에 비해 현실에서 내 귀를 자극했던 것은 탁하고 거친 목소리였다. 온전치 못한 망막 위로 이리저리 불빛들이 날아다녔다. 나는 다시 잠들고 싶었다. 아니, 선희를 보고 싶었다. 선희를 보기 위해서는 깨지 않는 꿈을 꾸어야 했지만, 외부의 자극들이 끝없이 나를 땅 위로 끌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