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주방일을 다시 한번 해 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해 준 이도 K였다.
나는 내가 생각해도 놀랄 정도로 흔쾌히 K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왜 더 빨리 그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아쉬울 정도였다. 우스꽝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세제가 풀린 뜨거운 물로 치즈 라자냐를 굽는데 쓴 스테인리스 쟁반을 닦고 싶었다. 그 촉감이 그리웠다.
내가 의사를 전달 하자, 아주 빠른 속도로 나를 위한 주방이 회복시설 내에 마련되었다. 회복시설 안의 모든 조리 과정은 당연히 자동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조리와 급식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설거지거리 중 일부를 배정받았다. 그리고 그것들을 긴 시간에 걸쳐 닦고 말리는 일을 했다. 실상 필요가 없는 행위였기 때문에 ‘일’이라기보다는 ‘놀이’라고 하는 것이 맞았지만…
여러 측면에서 ‘주방 놀이’는 만족스러웠다. 우선 재활 치료 사이에 뜨는 시간을 빠르게 보낼 수 있었다. 설거지를 하는 때만큼은 생각을 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제니 포울링을 비롯한 의료진들의 활짝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나와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이들은 내가 ‘주방 놀이’를 시작한 것이, 삶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들은 마치 가출했다 돌아온 자식을 보는 것 같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오히려 내게 처음 제안을 건넨 K는 자신의 말이 불러일으킨 변화에는 별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내가 사고를 당한 후에 출간된 책과 만화책들을 가져다주었고, 내 감상을 물었다. 그리고 내 평이 그들의 일반적인 의견과 다르면 즐거워했다. 내가 ‘선희라면 이 책을 좋아했을 거야’라고 말했을 때는 어찌나 흥분했는지 와인을 병 째로 들고 들이키기까지 했다.
생활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을 무렵, 나는 K에게 처음 선희가 내게 주었던 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주도에서 열리는 학회 때문에 1주일 정도 아르바이트를 쉰다면서, 그녀는 병아리가 그려진 노란색 카드를 내게 건네주었다. 그 카드를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K에게 그때 일을 설명하려고 하니, 나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특히 편지의 첫 문장이 기억에 남아요. ‘나는 네가 나를 하루라도 잊을 거라고 생각지 않아.’라고 쓰여 있었어요. 그리고 그 말은 400년 동안 사실이 되었어요.”
K는 빵을 든 채 입으로 가져가던 손을 멈추더니, 그대로 굳은 채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음식을 접시 위에 내팽개치고는 황급히 자리를 뜨는 것이었다. 잠시 후 회복실로 다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아주 오래된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뛰어왔는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창고에… 있었어요. 출판 연도가… 훨씬 전이라… 선희 교수님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