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손에는 카렌 블릭센의 [아웃 오브 아프리카]가 들려 있었다. 표시해 둔 페이지를 먼저 읽어보라는 말을 남기고, K는 본인의 거처로 돌아갔다.
나는 주변을 정리한 후 책을 집어 들어 파란색 테이프로 마킹된 페이지를 펼쳤다. 검은색 펜으로 줄이 그어진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저 줄이었지만, 나는 그 줄을 그은 이가 선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백인이라면 편지에 예쁜 말을 써서 보내고 싶으면 이렇게 쓸 것이다. 〈나는 당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프리카인은 이렇게 쓴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다음날 나는 주방으로 출근하지 않았다. 재활 치료를 받으러 가지도 않았다. 의식을 되찾은 후 처음으로, 나는 밤을 새웠다. 그리고 선희의 줄, 동그라미, 메모가 채워진 [아웃 오브 아프리카]를 반복해서 읽어 내려갔다.
나는 제니 포울링을 호출했다.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조금 이르지만, 내가 내려야 할 결정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잠깐 침묵을 지키던 그녀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 무렵에 회복실로 들르겠다고 말했다.
남는 시간 동안, 나는 다시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책의 내용이 아닌, 책에 남겨진 선희의 흔적을 따라갔다. 그제야, 한 가지 사실이 명확해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나는 K를 보고 절망하지 않았던 것일까? 오히려 나는 K가 선희의 후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안도감을 느꼈다. 나에게 K는 선희가 남긴 흔적이자, 메시지였다.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침대에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