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한 시 반 넘어 쓰던 글 마무리하고 자려고 누웠는데, 비가, 빗소리가, 귀에 달라붙어서. 귓바퀴에, 빗물이 자꾸자꾸 고이는 것만 같아서, 잘 수가 없었어요. 이따금씩 들리는 젖은 도로 위를 달리는 차바퀴소리. 단지 바로 옆 병원을 들락거리는 응급차 사이렌 소리. 가르고 베는. 빗줄기 사이로 후비고 들어오는 설고도 익은 어떤… 비명.
동선 작가님이 지난 글에 쓴 것처럼 저는 비만 오면 뛰쳐나가요. 어떤 날은 우산 없이. 어떤 날은 우산을 받쳐 들고서. 걷구 싶어. 속옷이 홀랑 젖게. 지난여름엔 자주 차를 타고 달렸어요. 앞유리창으로 우왁, 달려드는 비를 헤집으며 젖은 도로 위를. 그때 그 사진, 몇 장 보여드릴까요?
동선 작가님 말마따나, 저는야 막가파!
어느 비 오는 날이었나. 그런 생각을 했더랬어요. 끝과 끝의 맞닿음을. 모든 건 뫼비우스 띠처럼 한 몸은 아닐까. 모두 한 통속. 낮과 밤도, 멀쩡과 미침도, 있음과 없음도, 젖음과 메마름도. 당김과 밀침도, 다정과 무심도, 생기와 시듦도, 차오름과 스러짐도. 꽉참과 비움도, 달뜸과 침잠도, 떠돎과 웅크림도, 소란과 고요도. 곧음과 휨도, 고임과 흐름도, 사랑과 미움도. 그리고 삶과 죽음도. 어쩌면… 어쩌면, 오래전, 떨어져, 놓치고, 멀어진, 그때 우리도.
자려고 누웠는데, 온 세상 점령한 빗소리에 싹 달아난 잠. 영화나 볼까. 핸드폰을 침대 헤드에 매단 거치대에 끼우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처음… 은 뭘까요? 태어나면서 우린 성큼성큼 찬란한 빛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줄 알지만, 실은 죽음이 파놓은 구덩이를 향해 가는 건 아닐까요. 아니, 그런 줄 진즉에 알고도 고갤 꼬고 못 본 척, 시치미 떼고 있진 않나요. … 겁나서. 태어남은 죽음의 행진. 착착착. 한시도 쉬지 않는, 쉬려야 쉴 수 없는. 그러니 처음은 마지막의 신호탄. 우리 삶의 '첫'은 얼마나 많은 우연의 겹일까요. 겹침의 보고서일까요. 오늘 새벽, 빗소리 틈으로 파고든 문득, 인 궁금증. 사사삭, 펼쳐진 상상 레이스. 그러다, 그래서… 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화 <우연과 상상>.
실은 이 영화는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으로 가까와진 동선 작가님과의 친밀감을 껑충 높여준 영화이기도 해요. 우리가 좋아한 감독, 하마구치 류스케. 얼마 전엔 동선 작가님이 보라고 해서 그의 최신작인 영화 <악마는 존재하지 않는다>를 보고 제가 긴 댓글을 쓰기도. 그럴 때 참, 기뻐요, 폴짝. 좋아하는 무언갈공유하고 같고도 다른 의견을 나눌 때. 시공간 따위 무시하고. 동선 작가님이랑 티격태격, 투닥거리면서도 오래 수다 떨 수있었던 건 우리 두 사람의 닮은 승질머리 탓, 아니, 덕이었던 것 같아요. 증말 못 말리는 (그지같은) 승질머리,
영화 <우연과 상상>을 보고 글을쓴 적 있어요. 그땐 '구멍'이 보이더니, 오늘 새벽엔 다른 게 보였어요. 뿌연 불확실성과 보지 못하고 지나쳤고, 지나치고 있고, 지나칠 우연과 그 위에 그려질 상상 붓질. 그 무늬와 색. 그리고 마법의 순간. 저를 여기, 이 자리에 서게 한 그 모든 우연과 상상, 그리고 마법.
인연을 떠올렸어요. 지난겨울, 광화문 어느 카페에서 그녀를 기다리면서. 그럴 수밖에요. 암 환자가 되고 표준치료도 끝나서 뭐라도 해야 하지 않나, 그러는 참에 다들 숨만 쉬라는데, 그러긴 정말 싫었거든요. 매일 숙제하듯 숲에서 노닥거리고 닥치는 대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그래도 채워지지 않던 어떤 구멍, 구멍들. 그러고 있는데 전화해서 빽, 소리 지르던 후배 녀석. 언닌 글을 써야 해! 그래서 시작한 블로그. 그게 2019년 2월. 그리고 2020년 9월엔가 발 들여놓은 브런치. 그 바로 전, 블로그 안부창에 글을 남긴 블로그 이웃, 카덴자 님. 그녀가 바로 책 <영화처럼 산다면야>를 출간한 출판사 위시라이프 대표. 제 기억으론 암 투병 이야기인데 글이 문학적이다, 뭐 그런 얘길 하지 않았나. 그래서 감사하다고. 첫 책을 다른 출판사에서 출간한 걸 알고는 아쉬움 묻어난 안부를 남긴 그녀. 그러면서 블로그에 쓴 '숲' 이야길 달라고, 공저를 제안하면서. 그래서 쓴 '숲' 이야기는 다 쓰고는 어쩐지 아니다 싶어 덮은. 시간은 흐르고 흐르고 또, 흐르고. 보이지 않아서 몰랐는데, 제 글 곁에 머문 카덴자 님. 항시.
블로그 이웃이자 출판사 대표님인 카덴자 님이 보낸 편지와 카톡. 이 모든 우연과 인연의 겹....
그러고 지난 연말 받은 편지와 나눈 톡. 굼뜬 절 움직이고 짜게 한. 돌고 돌아… 그 겨울 광화문 카페에서 덜컥, 맞잡은 두 손. 그때 오른팔 소매 사이로 삐죽, 나온 압박스타킹. 저 팔로 필사를 했다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방암 환자인 저는, 알아요. 그 팔이 어떤 팔인지, 팔이어야 하는지. 저 팔로 필사를? 싸아해지는 눈가. 그렇게 제 맘을 꽉 그러쥔 그녀, 카덴자 님. 우리가 여기서 만나기까지, 우리 연이 이렇게 닿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돌아왔나. 얼마나. 우리가 보지 못한 얼마나 많은 우연이 그 시간에 내려앉았을까. 겹겹이. 지금 우리는 어디로 흐르고 있을까. 우리의 끝은 언제, 어디서, 어떤 풍경 안에서….
책을 내고 가까운 지인 몇한테 알렸어요. 언젠가 글에도 쓴, 학부모로 만났다 친구가 된 명희. 그 애랑도 어느새 스무 해 남짓.
나 책 냈어.
기다려봐.
그 애가 건 주문. 그리고 벌어진 마법 같은 일. … 울었어요. 많이.
우먼센스 모델인 명희. 그애가 진행한 이벤트.
명희, 그 애한테는 암 소식을 알리지 못했어요. 모든 치료가 끝나고 나서야 말할 용기가 났어요. 제 아픔에 그 애가 주저앉을 걸 알기에. 그 애는, 그런 애라. 그때 저는 무너지는 그 애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같이 무너져 내릴 게 뻔한데, 그러면… 그래서는 안 되겠기에. 안 될 것 같아서.
제 오랜 은사님이 건 마법의 주문...
…… 맨날 시뚝빼뚝 삐쳐서 빗장을 걸었다 열었다, 온다 간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저라는 사람. 그걸 다 알고도 내빼지 않은 여기, 당신, 당신들, 고맙고도 고맙고도 또 고마워요. 눈물 나게. 이제 와 고백하면, 도망치려고 했어요. 몇 번이나. 펄럭이는 그 마음 붙드느라 저도, 무진장 애먹었어요. 저한테 그럴 기미가 보일라치면 빗장 문고리 잡고 떡, 버티고 섰던 여기, 당신, 당신들. 다시, 또, 고맙고도 고맙고도 고마워요. 책 내기 전에도, 내고 나서도 맨날맨날 눈물바람. 여기, 당신, 당신들이 건 마법에 홀려서. 그 눈물방울 죄 받아 뵈드리고 싶었어요. 알알이 꿰어 달려가고 싶었다고요. 새벽빛 닮은 푸른 백련이라는 멋진 별명 지어준, 지향 작가님. 잊을 수 없어요. 책도 읽지 않고 모임에 초대하겠다던 수필버거 작가님과의 오랜 인연도요. 매일 들어가서 한 꼭지 한 꼭지 읽던, 절 뭉클하게 한 슬로우스타터 작가님 방, 그 방에서 나던 노오란 참외향이랑 들리던 경춘선 달리는 소리, 사진 속 작가님만의 시선. 잠긴 빗장에 대고 함께, 오래 쓰자고 한 초록 준 작가님. 제 책에 붙여놓은 인덱스 꼬옥 보여주고 싶다던 추앙하는 정연 작가님. 행복 줍줍하면서 저로 하여금 존경 줍줍하게 한 올드플로거 작가님. 제 브런치 웃음 버튼 자작가님. 문디, 라며 애정표현해 주는 능내리 주인장 이강순 작가님. 작가님이 가꾼 꽃처럼 향기로운 글 속에 숨어들어 가만가만 쉬다 가게 해준 라문숙 작가님. 나만 몰랐던 보석 같은 시 읽어주는, 댓글 몇 줄에도 절 알아본 저 먼 데 있는 이진민 작가님. 꼬박꼬박 잊지 않고 발걸음 해주며 선한 미소 닮은 댓글 달아주는 캐리소 작가님. 무조건적으로다가 편파적인 내 편, 이림 작가님. 텔레파시 통하는 사이, 숲속 뜨락 세라 작가님. 생일마다 잊지 않고 맛있는 케이크 보내주는 조승희 작가님. 엊저녁 정말 맛있는 복숭아 있다며 보내주겠다고 떼 쓴 서무아 작가님. 그 분이랑 바라본 어느 밤 달무리, 나눈 문장들과 음악. 금요일마다 그림으로 만나는 소리여행 작가님. 단단한 지지로 묶인 혜나무 작가님과 늘봄 유정작가님. 제 브런치 비밀 사하 작가님. 겹친 이름 나눠가진 김설 작가님. 그리고, 그리고…… 딸랑 A4 한 장 사이에 둔, 내 모든 낮과 밤에 '있는' 오직 사랑하는 내 콩, 폴폴 작가님. 일일이 이름을 다 부를 수 없어 미안한, 인스타에 이렇게 저렇게 홍보해 준 여러 작가님들…. 그리고, 또, 여기선 보이지 않아도, 어딘가엔 분명 있을…… 어느 날의 씀벗이었고, 여전히 그럴, 당신, 당신들. 우리 서로 마음이, 눈빛이 맞닿은 씀벗으로 여기서, 이렇게, 만나려면 얼마나 많은 우연의 겹이 있어야 할까요. ……있었을까요. 저는… 모르겠어요. 제가 아는 건, 여기, 당신, 당신들과 저한테 걸 마법. 여기서, 당신, 당신들의 씀벗으로, 숨 쉬게 해달라. 하루라도, 더. 한 시간이라도, 더. 1분이라도.
저는 썼어요. 한 번 마음에 들이면… 헤어지지 않는다고. 떨어진 적 없다고. 사라지지 않고, 지우지 않고, 제 빗장 안에 들인 '모든'과 함께 자라고 나이 든다고. 피가 되어 흐르고 살이 오른다고. 사랑은 뭘까요? 한때 제가 한 모든 사랑을 의심한 적도 있어요. 제대로 된 사랑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것 같아서. 원체 이기적인,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라. 철학자 박구용이 한 말. 누군가 품에 안았는데, 내 품처럼 느껴지면 그게 바로 사랑이에요. 그 어떤 이질감도 느낄 수 없는 품. 내 몸인 양. 그때 불어오는 자유의 바람. 당신은 그런 적 있나요? 저요? 글쎄요, 우연이 빚은 상상, 그때 튀는 마법의 불꽃. 어쩌면… 어느 날 불쑥, 번개처럼 올지도요. 먼 길을 돌고 돌아, 우연 덤불 넘어. 사랑은 기쁨일까요? 그러기만 할까요? 저는 썼어요. 사랑엔 여러 얼굴이 있다고. 찡그림, 고됨, 응어리, 무너짐, 진저리, 긁힘, 피맺힘… 그 또한 사랑이 뿜어낸 표정은 아닐는지요. 끝과 끝은 한 덩이.
자꾸 영화 쪽으로 기울던 저는 우연히 만난 동선 작가님이랑 원 없이 떠들었어요. 그러고 있고요. 우리 이야길 들은 사람들이 만들어갈 그들만의 이야기를 상상하고 짓고 꿈꾸면서.
제가 바라는 게 있다면, 드디어 찾은 구멍을 이렇게나 재미나고 신나게 함께 메워준 동선 작가님이 인생 최고의 순간을 맞았으면 하는 거예요. 그 누구보다 빛나게, 우뚝. 그때, 가깝고도 먼 데서 씨익, 입꼬리 올릴 어느 날의 저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뻐근한 가슴께. 왜냐구요? 우린 일만 겁을 돌고 돌아 만난 인연이거든요. 그쵸, 동선 작가님?
늦된 저는, 끝에서 시작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요. 뭐든.
사랑이 끝나고, 그제야 꽉, 붙들고 매달리는. 팔랑팔랑.
사랑할 적엔 아무것도… 뵈지도 느끼지도 만지지도 못해서.
휩쓸리고 뜯기고 떠내려가느라.
계속계속, 비가 와요. 많이 많이.
이 방학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이 여름이.
덧
글 제목은 좋아하는 폴란드 시인 비스와봐 쉼보르스카의 시 <첫눈에 반한 사랑>에서 인용했어요. 그림은 동선 작가님이 표지로 쓸까, 하고 그린 그림이고요. 그림 속 공간이 동선 작가님과 제 기억이 맞닿은, 그런 줄 알고 동선 작가님 한국 왔을 적에 처음 만나 영화 <애프터 썬>을 함께 본, '더 숲'이에요.
또, 덧
그런데요, 동선 작가님 인생 최고의 순간은 지금! … 나돈데. 저만 늦된 즐 알았더만, 아닌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