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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렇게 피어나

되새기기 - 영화 팟캐스트 <오직 사랑하는 영화만이 살아남는다>

by 여름

2년 전 봄, 복용하던 약에 내성이 생겨 바꾼 항암주사는 두 번인가 세 번 맞고는 효과가 없어 중단하고 지금 복용하고 있는 항암제로 갈아탔어. 그 봄부터야. 남들은 평생 한 번 찍을까 말까 한 CT촬영을 9주마다 찍고 경과를 보자고 한 게. 말만 꺼내도 징글징글하다며 울 엄마가 고갤 돌려버리는 그 검사는 12시간 금식하고 다음날 병원에 도착하자마자 채혈부터 해. 채혈이 끝나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으로 올라가서 일반촬영실에 접수하고 옷 갈아입고 X선 촬영이 끝나면 영상의학과로 가. 거기서 또, 접수하고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고 대기실에 앉아 있으면 간호사가 이름을 불러. 간호사랑 테이블을 마주하고 앉아 검사에 대한 설명을 듣고 동의서에 사인하면 간호사가 왼쪽 팔뚝을 두드리며 혈관을 찾아. 조영제 들어갈 주삿바늘을 꽂아야 하거든. 혈관은 한 번에 찾기도 하고 두어 번 주삿바늘을 찌를 때도 있어. 혈관이 약해서 찾는 게 쉽진 않거든. 주삿바늘을 꽂으면 대기실에 앉아서 기다렸다 내 이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그 방사선실로 들어가. 거기, 둥그런 기계 앞에 베드가 있어. 신발을 벗고 베드에 누운 다음부턴 시키는 대로 하면 돼. 두 팔을 머리 위로 올리라면 올리고, 숨을 들이마시라면 마시고, 멈추라면 멈추고, 다시 쉬라면 쉬고. 아프면, 팔을 들어 신호를 보내라는데, 여태 그런 적은 없었어. 참는 덴 도사라. 검사가 시작되고 조영제가 주삿바늘로 들어가면 몸이 뜨거워져. 손끝, 발끝, 사타구니부터. 이상도 하지. 그때마다 꼭 감은 눈 위로 애들 얼굴이 지나가니. 빨려 들어가듯 베드가 둥그런 통으로 들어가면 저 머언, 우주 어딘가로 떠나. 어딘지는 몰라도, 한 번쯤 가봤거나 언젠가 갈 수도 있는, 희고도 까만 세계로.


2주 전, 검사를 하루 앞둔 느즈막한 오후에 떡을 사러 갔어. 입안이 죄 헐어 먹을 게 마땅치 않은데, 쑥떡은 좀 먹겠어서. 떡을 사서 결제하고 문자 알림을 보니, 통장잔고가 이상해. 은행 앱을 켜고 들어갔더니 엄마가 돈을 보냈더라고.


엄마, 돈 보냈어?

어. 낼 니 생일이잖어.

생일이 대수야. 검사하러 병원 가는데….

검사는 검사고,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니야. 끝나고 돈 찾아서 밥 먹어.

(요즘 누가 돈을 찾아서 밥을 먹어. 카드로 결제하지.) 밥이 문제야.

그렇다고 밥 안 먹어? 돈 찾아서 밥 먹어.

(그러니까, 요즘 누가 돈 찾아서 밥을 먹냐고.) 어.

사는 게 다 그래.

(사는 게 뭐가 다 그래. 남들은 다 잘들 살더만.) 어.

그래도 어쩌겠어. 살아야지. 돈 찾아서 밥 먹어. 몸은 어때?

(요즘 누가 돈 찾아서 밥을 먹냐구!) 지금 밖이야, 끊어.


꼭두새벽에 일어나 이제 막 밝아오는 도로를 달려 병원에 도착해 채혈 먼저 하고 X선 촬영하고 영상의학과에서 주삿바늘 꽂고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그날따라 생전 보지도 않던 검사 안내서에 붙여놓은 스티커가 눈에 들어오는 거야. 거기, 애송이한테 날 떠넘기고 미국으로 토낀 주치의 이름이…. 아, 이 검사가 그가 마지막으로 내린 오더구나. 왈칵 눈물이. 그날은 베드에 누워 몸이 뜨거워지는데, 애들 얼굴 대신 주치의 얼굴이…. 검사 끝나고 집에 와 드러누웠다, 벌떡 일어나 달렸어. 짠 내음 나는 쪽으로, 계속, 계속. 가는 길에 보니 주렁주렁 보랏빛 등나무 꽃이랑 울 아부지 생일날이면 등불처럼 피어나던 진분홍 겹벚꽃이 연둣빛 능선을 따라 나보다 먼저 달리고 있더라.


바다야.

파도가 끝없이, 쉼 없이, 밀려오는.


다음날 수평선 위로 떠오는 붉디붉은 해를 보고 아침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밖을 보니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점들이 보였어. 저기, 떠있는 게 뭐지? 사람이야. 수평선을 바라보며 보드 위에 엎드린 서퍼들. 나는 홀린 것마냥, 수평선을 바라보다, 파도에 올라타는, 올라탔나 하면 물속으로 사라졌다… 해안가로 떠밀려 왔다 다시, 보드에 올라타서 두 팔을 저으며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그 몸을, 그 몸짓을 보고 보고 또 봤어. 질리지도 않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체크아웃하고 바다로 나갔더니 거기, 아직도, 몸들이, 있었어. 반짝반짝,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나는, 모래사장에 앉아서 봄햇살이 부서지는 바다를, 물결에 출렁이는 몸을, 보고 보고 또 봤어. 출렁이나 싶으면 흰 파도로 들이닥치는 물살을, 그 파도에 올라타는 몸을. 한 번도 같은 속도, 같은 모양인 적 없는, 파도에 올라타는 한 번도 같은 적 없는, 그 미친 몸들을.


돌고래 보러 가자.


여름 방학에 집으로 찾아온 친구랑 돌고래를 보러 떠난 모험 이야기, 영화 <1986 그 여름 그리고 고등어 통조림>을 다시, 봤어. 끝내 돌고래를 보지 못하고 돌아온 바닷가 모래사장에 벌렁 드러누워 히사가 타케한테 물어.


있잖아, 왜 나랑 오자고 했어? (내가) 자전거 가지고 있어서?

안 웃었으니까.

뭐?

우리 집 보고 (다른 애들은 다 웃어도) 너만 안 웃었으니까.


모험을 마치고 돌아와 집으로 들어가려는 히사를 불러 세우고 타케가 말해.


히사, 또 봐.


멀어지는 두 아이 목소리가 어둑해져 가는 골목에 파도처럼 되밀려와. 또 봐, 또 봐, 또 봐….


히사랑 타케는 여름 내 붙어 다녀. 산에서 귤 서리하던 날, 들켜서 도망치다 넘어진 히사를 향해 타케가 소리쳐.


마음을 먹어!

무슨 마음?

뛰겠다는 마음!


타케는 섬이야. 책상에다 그림을 그리다 망치면 침 바른 손가락으로 쓱쓱, 문지르고 다시 그려. 히사는 글쓰기에 재주가 있고 유카라는 가수를 남몰래 좋아해. 혼자서도 심심한 줄 모르고 잘 노는 두 아이를 연결해 준 건 탄탄바위 저 너머 부메랑 섬에 나타났다는 돌고래야.


돌고래를 보겠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전거를 끌고 탄탄바위를 넘고 바다에 빠져가면서 부메랑 섬까지 가서 돌고래를 못 보고 돌아왔는데도 하나 서운하지 않았던 건 돌고래보다 둘이 떠났던 그 모험길이 더 재밌어서. 돌고래는 못 봤어도 여름 내 놀 친구가 생겨서. 그러니까 책을 내자는 둥, 우리 목소릴 들려주고 싶다는 둥, 번지르르하고 그럴싸했던 내 이유는 '돌고래'였어.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그저 놀려는 시커먼 속내 들킬까, 들이민 '돌고래'. 난 말이야, 여름 내도록 개울에서 물장구치구 개구락지 잡고 메뚜기 잡다, 시시각각 달라지는 해 질 녘 하늘빛에 멍 때리다… 이제 고만 놀고 들어와 밥 먹으라는 엄마 목소리에 능그적능그적 들어가 방바닥에 엎디어 밀린 방학 숙제하다 밤이 이슥해지는 줄도 모르고 이바구나 떨구 싶었다구. 그런 꿍꿍이를 등뒤로 숨기고 잘 놀다가도 팽, 토라져 문 쾅 닫아걸었다 열었다, 밤새 한 숙제장 들고 튀면서, 애 먹였어. …미안해. 그래도, 그런데도… 나는, 폴짝, 좋았어. 그 모든 걸음이, 그 모든 숨이…, 닳을까, 아까워, 두 손에, 받아 들고는, 절절매게.


함께라면 뭐든 해낼 거라고 믿었던 타케가 자길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단 사실에 풀 죽은 히사가 마음을 닫은 사이, 엄마가 세상을 떠나 갑자기 전학 가게 된 타케. 히사는 저금통을 들고 뛰어나가 바다가 보이는 기차역 벤치에 앉아 있는 타케에게 다가가. 그리고 고등어통조림이 끄득 든 봉다리를 내밀고는 말해.


친구 맞아. 우린 친구야.

알아.

또 봐.

또 봐.

또 봐.

또 봐.


요즘 난, 바닷가 모닥불가에 앉아 두런두런 오고 가던 우리 목소릴 듣고 또 들어. 그때마다 너무 긴장해서 녹음할 땐 미처 보고 듣지 못했던 장면과 소리가 보이고 들려 덜컹이며 놀라. 근데 있잖아, 그보다 더 날 떨리게 하는 건 목소리 너머로 어른대며 다가오는 얼굴이야.


'제아무리 사랑 앞에서도 인간은 저밖에 몰라요. 아니, 저는 그래요. 제가 사랑에게 바라는 이기심은요, 저랑 있을 때만이라도 사랑하는 이의 모든 세포가 느슨해지길. 풀풀풀. 한없이, 풀어지길. 그리하여 우리 함께 고유시(固有時)에 이르길.' (이연, <영화처럼 산다면야> 중에서)


고요하고 화안하게 피어나는 니 얼굴.

나는 환호성을 내질러. 은밀하고 정중히.

그날 바닷가 모래사장에 앉아 서퍼를 향해 핸드폰 카메라를 누를 때처럼, 경외의 폭죽을 터트리며.


나는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 거기서, 출렁이며, 기다려….

내가 올라탈 파도를, 그날 서퍼들처럼, 파도에 쓸려 해안가로 떠밀렸다 다시, 또나를 고유시로 데려다줄 파도를….


'마음은 찢어지는 게 찢어지지 않는 것보다 낫다.' (메리 올리버)


또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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