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관이 되어버린 가식의 표현들
'다른 건 몰라도'란 말을 자주 하고 삽니다.
보통은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어떤 것을 강조하고
한편으로는 포기할 수 없다는 의지를 내보이면서
상대방에게 내 뜻을 관철시키는 용도로 쓰이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하여 쓰이는 경우도 많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시계는 좋은 걸 차야지
다른 건 몰라도 차는 중형은 되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집은 30평은 되어야지
다른 건 몰라도 피부는 관리를 받아야지
다른 건 몰라도 옷은 좋은 걸 입어야지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존심 하나는 지켜야지
다른 건 몰라도 자네 태도가 불량한 것은 참을 수 없네
다른 건 몰라도 남자라면 용감해야지
다른 건 몰라도 여자가 어떻게 그럴 수 있어?
그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다 괜찮은 게 결코 아닌데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지만' 그것도 아니야."
이게 내 본심에는 더 가까운데
언제부터인가 말버릇처럼 '다른 건 몰라도'로 고집을 부리곤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차는 좋은 걸 타야지' 하면서 분수에 맞지 않는 고급 차를 샀다고 한다면
그 차에 맞춰야 하는 “또 다른 것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좋은 차를 타면 보험료나 연료비 등 유지비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좋은 차를 타고 가는 곳도 달라지게 됩니다.
동네 마트에 가서 장 볼 일이 있다면 백화점에 가서 쇼핑하게 되고
허름한 맛집에 찾아갈 일도 멋지고 화려한 고급식당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 차에 태우는 사람도 그 차를 보여주는 사람도 점점 다른 방향으로 갑니다.
'다른 건 몰라도 자동차에 대해서만'이라고 시작했던 것이
결국은 내 주변의 모든 것으로 확산되어 버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50이 되고 나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은 이라고 고집을 부리고 싶은 것이 줄어들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어머니에게는 잘해 드려야지.'
물론 좋은 의도였습니다만
이것만은 포기하면 안 된다면서 스스로를 구속했나 봅니다.
저는
제가 어머니에게 무언가를 잘했을 때엔
아내에게 ‘당신은 왜 못해?’라는 식으로 불만이었고
반대로 제가 잘 못하고 신경을 못 쓸 때에도 역시 아내나 가족들에게 불만을 돌렸습니다.
이제 '다른 건 몰라도'란 말을 떼고 나니까 비로소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어머니에게 효도하고 잘 모시는 건 좋은 일입니다.
할 수 있을 때 열심히 잘하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잘해도 부족한 것은 있기 마련이니
부족하다 해서 스스로 너무 몰아가거나 다른 데로 탓을 돌리지는 말아야겠습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우리는
많은 '다른 건 몰라도'를 이미 고집하여 살았을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좀 더 여유롭게 세상을 보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어렴풋이 느끼게 될 때
아마도 좀 더 훗날이 될 듯합니다만
'내가 살아보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 하나는 너도 꼭 마음에 담고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딸의 손을 잡고 이야기해 줄 수 있는 때까지
아껴두고 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