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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학중년 마크 Oct 11. 2023

온전한 산책

만 걸음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기

하루에 만 보를 걷기를 목표로 한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만 보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1초에 두 걸음을 걷는 속도로 꼬박 1시간 30분을 걸으면 만 보 정도가 되더라. 

내게 1초에 두 걸음은 꽤 빠른 걸음이다. 


십진수, 즉 10의 거듭제곱 단위의 숫자가 주는 쾌감이란 오묘한 것이어서

만 보를 목표로 하는 동안에는 

하루에 몇 번씩 만보기 앱을 들여다 보며 숫자를 확인했다. 

8천 걸음을 걷는다고 해서

만 보를 걸은 어떤 날보다 

덜 건강하게 산 것은 아닐텐데

그저 그 숫자를 채워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에서건 밖에서건 계속 걸음 수를 체크하며 다녔다.      

본말전도란 이런 것인가

     

어느 날 집 앞에 잠깐 물건을 사러 나갔다가 산책로에 봄꽃이 활짝 핀 것을 보고는 충동적으로 길을 따라갔다. 

핸드폰은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그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는 지금 걷는 나의 걸음 수가 카운트되지 않겠다는 아쉬운 생각이 번뜩였다. 

무척 후회스러운 마음이었다. 

다시 집에 올라가서 핸드폰을 들고 나올까. 예쁜 꽃을 보면 사진이라도 찍고 싶을텐데..

그럴까 말까의 갈등이 무수히 왔다갔다 하던 그 순간.


아, 나는 만 보 걷기가 아니라 산책을 하려는 거야
      

생각을 멈추고 다리를 움직였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10여분 걸었을까 

서서히 불어오는 바람이 얼굴에 느껴지고

거기에 장단 맞추듯 살랑거리는 꽃들의 춤사위도 차츰 눈에 들어왔다. 

걸으면서 문득 문득 여러 사람들이 떠오른다.

어제 있었던 일이나 내일 할 일들도 스쳐 지나간다. 

두 다리는 묵묵히 나를 앞으로 옮겨주며 아무 말이 없다.


눈으로는 세상을 담고 

마음으로는 나를 이루고 있는 삶을 담으며 

그저 걷는다.

몇 걸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온전한 산책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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