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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 Apr 20. 2024

어머니의 마지막 식사

정수리에 탈탈 털던 누룽지 한 컵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3개월 전 병원에 입원하셨다. 위암에 걸리신 후 2년 정도 사회생활과 병원 운영을 중단하고 집에서 주로 생활하시던 어느 날 장 유착으로 병원에 입원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다음날 병원에 찾아갔다. 어머니는 병원 침대에 앉아서 병문안 온 사람들을 맞고 계셨다. 그렇게 병원에 며칠간 기운 없이 누워계시다가 어느 날 뭘 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면서 누룽지를 끓여오라고 하셨다. 


당시 우리 부부는 시댁에 살다가 따로 나와 산 지 반년 정도 됐었다. 누룽지를 드시고 싶다는 말에 남편이랑 시댁에 가서 집에 있던 누룽지를 끓였다. 옆에는 시외할머니가 지켜보고 있다가 누룽지를 젓는 나무 숟가락이 안전한 거냐고 아무래도 안심이 안 된다고 안절부절하셨다. 나는 나무 숟가락에 어떻게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할머님 눈에는 나무에 칠한 약품이 문제일 수도 있어 보였나 보다. 지금도 그게 문제인지 아닌지 모르겠다. 그래도 그냥 쓰고 있다.


그 누룽지를 보온 통에 담아서 병원에 들고 갔다. 컵에 담아서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어머니가 너무 맛있게 꿀꺽꿀꺽 삼키시고 장난스럽게 종이컵을 머리 위로 털어 보이셨다. 그때 어머니 표정에 자신감이 넘쳤다.


어머니가 밥을 드신 건 그때가 마지막인 것 같다. 검사 상으로는 유착이 해결됐다는 말이 없었는데 그래도 어머니 의견으로 누룽지를 드셨던 거였고 어머니는 의사고 나는 잘 몰라서 그냥 드렸는데 역시 잠시 후 드신 걸 모두 토했다. 


어머니는 이후로 자주 토했다. 소화기관에서 만들어지는 액이 내려가지 못해 나오는 거라고 했다. 어머니는 집으로 와서 주사액에 의지해 누워계셨고 나와 남편, 시동생과 동서가 서로 번갈아 가면서 어머니를 간호하고 식구들을 위한 밥을 차리고 병문안 오는 사람들을 접대했다. 동서하고는 번갈아 밤새 옆에서 어머니를 간호했다. 참 힘든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밤에도 낮에도 잘 주무시지 못했고 열도 종종 났다. 그렇게 어머니를 간호하면서 여름이 지나갔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부터는 무더운 여름이 드디어 끝났는지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서 발인 날에는 한결 편안하게 묘지에 다녀올 수 있었다.


어머니는 음식을 좋아하셨다. 내가 계란만 삶고 있어도 반가워하면서 드셨다. 결혼하고 매일 남편과 새벽에 일어나 시댁 아침을 차렸었다. 남편도 나도 아는 게 없었는데 나는 내가 아는 게 없다는 걸 몰랐다. 결혼하기 전 몇 번 요리해 본 게 다이면서도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고 어머니도 나와 남편이 차리는 아침에 거의 관여하지 않으셨다. 

아픈 사람은 단백질을 잘 먹어야 한다고 해서 매일 계란, 두부, 소고기 요리를 했고 콩국을 매일 드시면 좋다고 해서 아침마다 흰콩을 삶아서 믹서기에 갈아 드렸다. 내가 결혼하면서 가져간 요거트 제조기로 요거트도 만들어서 매일 꿀, 홍삼 등을 타서 드렸다. 성격상 남을 섬기는 걸 못하는 나는 당연히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드라마 <보고 또 보고>에 나오는 은주 같은 성격이라면 시어머니 병간호를 얼마나 행복하게 했을까? 하지만 나는 남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없었다. 은주의 철부지 언니 금주를 더 닮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살기도 했고 남의 관심을 원하는 성격이 아니기도 하다. 그런 사람이 결혼했다는 이유로 시부모님을 위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아침을 차려야 하니 반발심이 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빠가 퇴직하기 전에 빨리 결혼하라고 등 떠민 엄마도 미웠다.


어머니의 주장으로 매주 교회에 가야 했던 것도 반발심이 자라난 이유였다. 나는 교회가 싫었다. 학창 시절 열심히 다니던 교회에 크게 배신당한 기분을 여전히 느끼고 있어서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에 화가 많이 나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기독교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생각하셨고 그것도 자신이 다니는 교회만이 옳다고 여기셨다. 어머니가 아프기 때문에 식구들도 평소엔 가지 않던 교회에 다 같이 다녔고 나는 일요일에 교회에 갈 때마다 화가 났다. 그래서 어머니가 좋아지지 않았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이제는 이틀에 한 번씩 옆에서 거의 밤을 새야 하고 낮에는 가정부 아주머니가 이제 시댁 들어와서 같이 살라고 잔소리하는 걸 들어야 하고 매일 자주 찾아오는 친척들과 어머니 친구분들을 대접해야 하니 마음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몇 달을 지내고 나니 자연스럽게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신기한 마음이 자라기 시작했다. 어머니를 위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 수업>, 마음의 신비한 작용을 다룬 EBS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다시 엮은 <마음> 같은 책들이 많이 들어왔는데 나도 이런 책에 관심이 가서 많이 읽고 어머니에게 이야기도 해 드리면서 전에는 알지 못했던 마음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어느 날 너도 이제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시면서 시아버지에게 나 가까운 데로 묻어주면 안 돼요? 하고 물었을 때는 나도 모르게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때 내가 느낀 건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 마음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을까?     

나는 힘든 일이 힘든 일만은 아니고 나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았던 것 같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시아버지가 어머니의 관에 넣을 편지를 써오라며 자식들에게 한지를 한 장씩 돌리셨다. 이때도 반발심이 일었다. 효성을 드러내는 편지를 강제로 쓰라는 게 강압적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편지에 이런 새로운 마음을 배우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적었다. 그 한지를 둘둘 말아서 아버님에게 드리면서 절대 열어보지 마시라고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훨씬 지났다. 몇 년 전에 묘를 옮겼는데 그때 우리 자녀들이 쓴 편지가 나왔을지 모르겠다. 이장하는 곳에 가보지 못해서 확인하지 못했고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그 편지에 대해서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래도 감사한 마음은 어머니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지금도 가끔 반발심에 사로잡혀 그런 고생을 내가 왜 했는지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고집과 병은 적어도 나에게는 내 건방진 아집을 꺾는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아주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 되었다. 같이 마트에 장을 보러 가면서 내가 당신을 편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더 오래 사셨으면 편해졌을 것도 같다. 생각보다 어머니가 나에게 준 선물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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