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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치아 lucia Oct 05. 2022

고아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9월이 되면 아침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법인데, 올해는 여전히 더웠다. 물론, 35도의 폭염은 한풀 꺾였으나, 여전히 낮 기온은 30도를 웃도는 여름 날씨였다. 기후변화를 실감했다.


9월 초, 엄마의 기일 즈음해서 제주도에 피정을 다녀올 계획이었으나, 역대급 태풍 힌남노의 상륙으로 피정은 취소되었다. 비가 많이 왔고, 제주도와 남부지방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러다 9월 7일이 되자, 해가 눈부셨고 하늘은 너무 아름다웠다.    

  

엄마가 떠났던 2020년 9월 7일에도 태풍이 왔었다. 내내 건물 안에만 있었지만, 조문객들을 통해 비바람이 몰아친다는 소식을 들었다. 3일 장례를 끝내고 나왔을 땐, 여름옷차림이 서늘하니, 손발이 추웠다.

2021년 9월 7일에는 제법 비가 왔다. 빗속에 둘째 언니와 기일 미사를 보고, 뜨끈한 전복해물탕을 먹고 돌아왔었다.

올해도 비가 오려나, 거센 태풍에 피정도 못 가고 내내 마음이 울적했는데, 태풍이 지나간 맑은 하늘과 눈부신 햇살은 가슴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그렇게 엄마의 기일을 맞이했다.

남편과 둘째 언니, 남동생과 함께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성당에서 기일 미사를 드렸다. 미사 후에 근처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점심도 먹었다. 따듯한 오후 햇살 맞으며 정동 길 산책도 하고, 좋은 시간 보내고 집에 귀가했다. 남편이 휴가를 내고 내내 함께 있어 주었다. 늘 고맙다.    

 

<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어느 날 둘째 언니 화장대 위에 책이 놓여있었다. 제목이 눈길을 끈다. 책을 펴보니, 2~3페이지짜리 짤막한 산문들이 모여 있는, 쉽게 읽히는 책이었다. 읽다 보니 문체도 맘에 들고 감성도 내 스타일인지라, 몇 장 더 넘겨보다 무심히 뒷 표지를 보았더니, 이런 글귀가 쓰여 있었다.  

   

우리는 모두 고아가 되고 있거나 이미 고아입니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그래도 같이 울면 덜 창피하고 조금 힘도 되고 그러겠습니다.     


수년 전, 친한 언니가 몇 달 간격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까지 잃은 일이 있었다. 두 분 다 병환이 깊으셨으나, 그 슬픔과 황망함은 쉽게 짐작이 가질 않는다. 그 언니에게 위로 비스름한 것을 하려고 애써가며 대화하고 있을 때, 언니가 말했다.


‘나, 이제 고아야. 나 이제 고아다?’

 

언니는 되게 기가 차다는 듯 말했고, 말끝엔 피식 웃었다. 나는 그때, 위로 비스름한 것을 하려는 어쭙잖은 마음을 접었다. 그 슬픔은 몇 마디 말로 위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니의 그 표정과 말투가 나는 내내 생각 난다.     


이제 내가 고아가 되었다. 나의 부는 가족관계증명서 서류 안에 존재할 뿐, 나의 정서 안에서, 나는 고아다.

‘고아孤兒’라는 단어 안에 부모를 잃은 나의 슬픔과 절망과 고독이 모두 들어있다. 쉽게 위로조차 건넬 수 없는 그 처지가 단어 안에 모두 들어있다.


나는 고아다. 자다 일어나 ‘엄마, 보고 싶어’ 중얼거리며 울어본다고 달라질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우리는 그렇게라도 이 시절을 견디고, 이 생을 살아가며, 엄마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 함께 울어주어 고마운 사람들과 함께, 나와 같은 처지인 고아들과 옛이야기들을 서로 추억하며, 나는 9월을 견디고 살아냈다.   

  

엄마가 떠난 후로, 나의 2년은, 엄마에게로 가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우린 모두, 나이가 들고 부모를 떠나보낸 뒤, 고아가 된다. 엄마를 다시 만나기 위한 긴 여정은, 마침내 엄마를 만나고,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며 마무리되는 것 같다. 내 엄마도 고아인 세월을 견디고 살아내어, 엄마의 엄마에게로 돌아간 것처럼.

나도 이 생을 충실히 살아내어, 엄마에게로 가야지. 좀 창피하더라도, 같이 울고, 서로 힘 되어주며, 나의 이 여정을 잘 마무리해내야지.

     

9월이 가고, 이제 10월이다. 많은 양의 가을비가 오더니, 진짜 가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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