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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unnun Mar 29. 2019

뜨거운 강물

Bolivia, Aguas caliente

볼리비아는 여행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다.


사람들은 불친절하고, 여행자들에게 호의는커녕 관심조차 없으며,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경찰들은 외국 번호판의 차만 보면 잡아 세워 트집을 잡고, 전통 복장의 여인들은 사진을 찍으라며 포즈를 취해준 뒤 돈을 요구한다고 한다.


미국에서 아르헨티나까지 오토바이 여행을 했던 이반은 볼리비아의 ‘볼’ 소리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돈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불합리하다며 항의를 하자 경찰은 주먹으로 그를 때리고 오토바이 라이트를 부셨다. 그리고 라이트 없이 운전하는 건 불법이니 벌금을 내라고 했단다. 이반은 다시 여행을 계획하고 있지만 볼리비아에는 한 발도 들이지 않겠다며 주먹을 부라렸다.


주유소에서 세금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은 현지인들보다 세 배가 넘는 가격을 지불해야 한다. 볼리비아 국경 도로변에는 커다란 플라스틱 통을 늘어놓고 파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외국인들은 주유소에서 두어 블럭 떨어진 곳에 주차를 하고 통을 들고 가서 기름을 사기 때문이란다. 가격 차이가 그 정도나 되니 기름을 이십 리터나 채운 통을 직접 들고 옮겨 차에 넣는 수고를 감수할 만하다.


국경도시 꼬룸바(corumbá)에 도착한 건 오후 다섯 시 무렵이었다. 볼리비아 영사과 근처에 캠핑버스를 세우고 다음날 아침 일찍 볼리비아 비자 신청을 하기 위해서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다. 밤이 되어서도 더운 날씨는 누그러들지 않았고 밤새 땀을 흘리며 뒤척였다.


아침 8시, 일타자로 영사과 진입에 성공했다.


콧수염이 인상적인 볼리비아 영사의 깐깐한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내 뒤에는 세 번이나 빠꾸 먹고 삼일째 영사과에 오고 있다는 이스라엘 남자가 서 있었다. 나 역시 빠꾸였다. 볼리비아 비자를 받으려면 한 달 동안의 여행 계획과 체류기간 전체의 숙박 예약 내용을 제출해야 한다. 호텔 숙박을 하지 않는 나는 상황을 설명했지만, 콧수염 영사는 수염을 한번 쓰다 듬고는 예약하는데 돈 드는 거 아니니 얼른 해서 가지고 오라고 답변했다.

* 볼리비아 비자 신청 시 필요한 서류*

- 6개월 이상 만료기간이 남은 여권
- 3x3 컬러사진
- 여행 계획(날짜와 장소 간단히 기재)
- 황열병 예방접종 증명 카드
- 잔고 증명을 위한 본인 명의의 은행 사용내역(잔고 금액은 비자를 신청하는 대사관이나 영사과마다 다르게 적용 400-2000달러)
- 여행 기간 동안의 숙박 예약 내용 혹은 볼리비아 국민의 초청 문서(초청 문서의 경우 합법적인 거주증명이 가능한 볼리비아 국민이 작성해서 볼리비아 내의 공공 기관에서 공증을 받아야 함)


한두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비자 신청이 오후 네시가 되어서야 끝났다.


빨리 볼리비아로 넘어가고 싶었던 우리는 다소 늦은 시간이었지만 일단 국경을 넘기로 했다. 물리적으로는 십 킬로미터밖에 되지 않는 길이었지만, 브라질과 볼리비아의 거리는 결코 가깝지 않았다. 관료적인 것들을 모두 처리하는데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국경을 넘을 때는 언제나 긴장된다

도시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이민청과 검문소가 있었던 브라질과는 달리, 볼리비아는 국경이라고 불리는 선을 넘자마자 뭔가 복작복작했다. 도로는 주저 없이 막바로 도심으로 이어지는데 그 옆으로 인터넷 카페며, 구멍가게들의 잡화들, 승객을 호객하는 택시들이 마구 뒤섞여 펼쳐져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신고도 없이 그냥 내달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무지막지하다고 소문난 볼리비아 경찰들을 선방할 수 있는 도장 찍힌 서류들을 손에 쥐고 나서야 우리는 조금 안도한 마음으로 캠핑버스 각자의 자리에 올라 타 몸을 깊숙였다. 이미 해는 뉘엿거렸지만 기분만은 한껏 상기되어 큰 아이가 볼리비아! 라고 외치면 막둥이가 비아, 비아! 라고 화답하는 노래를 불렀다.


원래 아구아스 깔리엔테(aguas caliente)라는 마을까지 가려던 계획이었지만 도로가 너무 어두워 운전이 쉽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빠져나가 가장 가까운 마을로 들어가니 시장이라고 쓰인 건물과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관광객에게 무관심하다고 알려진 볼리비아 사람들이 웬일인지 우리 캠핑버스 주변으로 하나 둘 모여들었고, 우리는 결국 시장 건물 옆에서 밤을 보내게 되었다. 시장 사람들과 뒤섞여 닭고기 스프를 주문하고는 단숨에 후루룩 마셔버렸다.


다음날 아침 해가 뜨니 주변을 조금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볼리비아를 명확하게 봤다고 하기는 힘들었다. 마떼차 마실 물을 끓인 다음 목적지인 캠핑장을 향해 서둘러 이동했다.


중심 도로를 벗어나자 붉은 흙길이 이어졌는데 핸드폰은 시그널조차 잡히지 않아 지도를 확인할 수 없었다. 길 옆으로 수영복과 물놀이 도구를 파는 상점이 하나 있어 이 근처겠구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작은 상점에 사람들이 모여있어 그 옆에 차를 세우고 남편은 길을 물으려 했다.


아이스크림이 든 낮은 냉장고를 전면에 배치한 작은 가게에는 예닐곱 정도의 성인들과 다섯 명의 아이들이 물건을 사고 있었는데 멀리서 봐도 그들의 복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자들은 멜빵바지에 밝은 체크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고, 여자들은 얇고 검은 두건을 머리에 쓰고 교복 같은 원피스 차림이었다. 색깔만 조금씩 차이 날 뿐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이며 바느질된 모양이 하나같이 똑같았는데, 아이들까지도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하얗고 작은 얼굴에 머리카락은 하나같이 다들 금발이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간다면 아마도 푸르거나 옅은 녹색의 눈동자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어두운 색의 피부와 작은 키의 볼리비아인들 사이에서 그들은 분명히 눈에 띄는 사람들이었다. 말하자면 수십 년 전의 어느 유럽의 농장에서 시간을 거슬러 튀어나온 사람들 같았다.

바로 이런 모습이었어요


캠핑버스를 옆에 세우고 창문을 끝까지 내리며 남편이 말했다. 부엔디아, 여기 근처에 캠핑장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두건을 쓴 원피스의 여자들이 일제히 우리 쪽을 바라보는데, 순간, 차창을 사이에 두고 마치 다른 시대의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굴이 유난히 창백한 한 여자는 아이스크림을 먹는 중이었는데 나이와 어울리지 않게 입술 주변에 하얀 아이스크림이 잔뜩 묻어있었다. 남편의 목소리가 들리자 살짝 놀란 듯한 얼굴로 입 주변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핥아먹는 표정이 고스란히 보였다.


혹시 이 근처에 캠. 핑. 장이 어디 있는지 아세요?


스페인어를 쓰는 이 곳 볼리비아에서 남편은 분명히 스페인어로 그들에게 물었지만


대답없는 적막.


그들은 자신들의 행색에 어울릴법한 유럽의 한 시골 농장에서 갑작스레 외국인의 외국어로 지껄이는 소리를 들었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봤다. 대 여섯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들 셋은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폭이 넓은 원피스와 검은 두건 차림이었는데, 그 아이들 치마의 잘 잡힌 주름들을 보는 순간 어린 시절 티비에서 보던 만화 주인공들의 복장이 떠올랐다.


두 여자의 머리가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렸고 남편은 뭐가 감사한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감사하다는 인사를 한 뒤 다시 운전을 이어갔다.


그들의 시선을 뒤로하며, 남편과 나는 동시에, 저 사람들 뭐야? 하면서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곧이어 오토바이를 타고 한 남자가 지나가는데 그 남자는 우리에게 알맞은 설명을 건넸다. 그러면서 한마디를 덧붙였다.


Hasta luego, boludo!

다음에 보자, 쨔샤!


(볼루도Boludo는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말끝마다 붙이는 ‘짜식아’라는 비속어다.)


마침내 지도도 없이 캠핑장에 도착했다. 아구아스 깔리엔떼(aguas caliente)는 뜨거운 물이라는 뜻이다. 뜨거운 강물이 흐른다는 말을 인터넷에서 언뜻 읽었는데 나는 당연히 이름과 연관한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진짜로 강물이 뜨거웠다!!!!


벌건 대낮의 멀쩡하게 생긴 강이 뜨끈 거리 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었다.


발을 담그니 송사리들이 달려들어 각질을 제거해주는 서비스까지 선보인다. 이것은 말로만 듣던 물고기테라피!

발만 담그는 것으로 성에 차지 않아 입고 있던 반바지 차림 그대로 강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물의 온도가 40도는 되려나? 남편과 나는 39도와 40도를 두고 실랑이를 벌였지만 온도계가 없어 정확한 온도를 알 수는 없다. 하지만 물에 들어가면 뜨끈한 느낌이 들 정도로 제법 온도가 높은 물이었다. 뜨거운 물속에서 흐응 흐응 허어어어~~ 만족스럽다는 뜻의 요상한 신음 소리를 내고 있자니 아무도 없는 대중목욕탕에 들어와 듯한 기분이다. 수십 마리의 송사리들이 몰려와 온 몸을 쪼아대며 기분 좋게 간지럽혔다.


다음날 아침, 그러니까 오늘 아침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요가 매트를 집어 들었다. 벌써 몇 달째 요가는커녕 허리도 제대로 한번 펴지 못하고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 앞에 매트를 깔고 태양 경배 자세를 몇 번 하지도 않았는데 숨이 헐떡거리고 팔이 부들거렸다. 모기들이 거슬렸고, 자다 깨서 울고 있을 막둥이가 마음에 걸렸고, 매트 위로는 작은 개미들이 마치 고속도로를 건너는 동물들처럼 위태롭게 지나다녔다.


요가 동작이 기억도 나지 않아 그냥 같은 동작만 몇 번 반복하다가 벌러덩 누워버렸다. 그 와중에도 발을 짚던 곳에 머리를 대고 눕는다는 요가 선생님의 말이 생각나 방향을 고쳐 누웠다. 숨을 고른 다음 앉아서 명상을 하고 싶었지만 몇 달 전에 골반을 삐끗해서 가부좌를 할 수가 없었다. 가부좌를 할 수 없는 요가라니. 강 건너에서 투칸들이 빽빽거리는 이상한 소리로 울어대는데 도무지 집중을 할 수는 없었지만 혼자 그러고 있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가부좌가 안되니 그냥 장기 두는 할아버지 자세로 한쪽 무릎을 구부려 세우고 앉아 멍을 때렸다. 출렁거리는 강물 위로 바람이 불자 따뜻한 공기가 얼굴에 닿았다.


아무도 없지?


옷을 훌러덩 벗고 뜨듯한 강물로 걸어 들어갔다. 온천욕 즐기는 원숭이마냥 얼굴만 쏙 내밀고 물속에 앉아 넓디넓은 목욕탕을 혼자 차지하고 있자니 흐음 흐음 아저씨 신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러고 한참을 앉아 있는데도 지구 상에 뜨거운 강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믿어지지가 않았다.

팔다리를 바둥거리자 송사리들이 더 많이 몰려와 온몸을 쪼아댔다. 그 작은 입들에게 살점이 모두 뜯기고 뼈만 남아 버린다면. 모든 무거운 것들이 떨어져 나가고 아무 짐도 없는 내가 되어 여행을 계속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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