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내 생일 최소 일주일 전에는 어떤 마을에 도착했으면 좋겠어. 애들이 많은 마을이어야 해. 친구들 많이 사귀어서 생일 파티에 초대할 거야."
새안이가 진지한 눈빛으로 자신의 요구를 말했다. 여행을 시작한지 서너 달쯤 지나서였을 것이다. 여행이라는 걸 몇 달 해보니 당최 친구들을 진득하게 사귀기 힘든 구조라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를 사귈만하면 이동, 좀 놀아 볼만하면 또 이동. 친구들과 헤어지는 새안이를 볼 때마다 내 마음도 그리 편하지는 않았었다.
생일 한 달 전, 페루에서부터 새안이는 엄마 아빠가 못 미더웠는지 생일날 어디에 도착해 있을 거냐고 집요하게 물어왔다.
우리는 8월 한 달 동안 작은 마을에서 새안이가 학교에 다니는 상상을 했다. 또래 친구가 필요한 아이를 위해, 그동안 쉼 없이 달려온 우리 스스로를 위해 한번쯤 길게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싶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인스타그램으로 연락만 해오던 한 가족과 우연히 만나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스페인 출신의 마르타와 다니엘은 세 아이들과 함께 캠핑카로 세계여행을 시작한 당찬 가족이다. 타오가 일곱 살, 둘째 다라가 네 살, 막내 에릭이 두 살이니 우리 아이들과 나이 또래가 비슷했고, 육아하는 방식도 많이 닮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아주 편안한 가족이었다. 마르타는 이미 에콰도르에서 아이들을 보낼 학교까지 알아봐 둔 상황이었다. 대안 학교라는 말을 듣자마자 귀를 쫑긋하게 세운 나는 즉각 교장선생님의 연락처를 얻어내 연락을 취했고, 새안이의 한 달 입학에 대한 허락을 얻어냈다. 마르타의 귀한 정보력에 살짝 숟가락만 얹은 셈이었지만 그야말로 탁월한 추진력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새안님이 지시한 대로 우리는 8월이 되자마자 이곳 아얌페(Ayampe) 해변 마을에 도착해서 한 달을 살아보게 되었다. 큰 아이들이 오전에 학교에 가는 동안 마르타와 나는 하루씩 번갈아가며 막내들을 돌봤다. 공동육아로 짧지만 유용한 아침 시간까지 확보하는 엄마들의 현명함이라니. (아빠들도 함께 하는 여행이지만 아이들을 책임지는 주보육자는 역시나 엄마들인 현실!)
바다가 해를 삼키고 내뱉기를 반복하는 동안 새안이의 생일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네 놀이터에서 돌아오는 길, 고소한 빵 냄새에 코가 절로 벌름거렸다. 이건 보통 빵 냄새가 아닌데? 후각이 예민한 나는 누군가 전문가 이상의 제빵 솜씨로 오븐 가득 빵을 구워내었다는 사실을 파악했고 빵 냄새의 출처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냄새는 파란문에서부터 샘솟고 있었다.
당차게 문을 두드리자 한 청년이 문을 열었는데, 나의 시선은 청년보다 그 안쪽, 그러니까 오븐 문이 열린 사이로 보송보송하게 부풀어 오른 빵들에 먼저 날아가 꽂혔다. 양손으로 잡고 반으로 가르면 쫄깃한 빵 결 사이로 모락모락 김이 쏟아져 나올 것이 분명한 갓 구워진 빵들, 그냥 밋밋한 빵도 아닌 허브잎들이 조각조각 박힌 아르헨티나 전통 시골 빵이라는 것도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여행 왔다가 눌러앉았다는 마리아노와 나우엘 두 사람은 빵가게를 차리려고 준비 중이라고 했다. 생일 파티에 필요한 음식에 대한 생각으로 머릿속이 분주했던 터라 앞뒤 잴 것도 없이 케이크와 피자와 빵을 부탁했다. 그리고 빵집을 구축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부족한 두 사람을 위해 이런저런 제빵 용품을 구입하는 것을 도와주기로 했다.
젊은 청년 둘이 외국에서 뭔가를 해보겠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 기특해 일감을 지워주긴 했지만, 마리화나를 피워 나른한 눈빛, 장사꾼의 피는 한 방울도 흐르지 않는 듯한 두 사람의 느릿한 말투에 솔직히 믿음과 의심이 반반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자유롭게만 살아온 듯한 히피 청년들이 첫 고객의 주문 사항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을까, 긴가민가 했다.(나는 그러고도 두 사람이 못 미더워 매일 그 집을 들러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는지 은근슬쩍 감시하는 치졸함을 면하지 못했다)
새안이는 생일 일주일 전부터 초대장을 직접 만들며 공을 들였다. 여덟 살 아이에게 생일이 이렇게나 중요한 거였나 싶으면서도 생일 파티를 손수 지휘하고 싶은 아이의 열성적인 태도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매년 생일마다 생일 케이크를 어떻게 꾸밀지 결정하던 아들이다. 다섯 살 생일에는 자동차, 여섯 살 생일에는 눈 덮인 집, 일곱 살 생일에는 피라미드를 메인 테마로 지정해 주었고, 손재주가 남다른 남편은 과자와 녹인 초콜릿으로 그것들을 모두 만들어 냈었다. 올해는 특히 난이도가 높은 테마가 정해졌는데, 케이크는 파란 바다일 것이며, 그 위에서 신나게 서핑하는 사람 옆으로 혹등고래의 꼬리가 보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에 보고 온 혹등고래와 이곳 해변에서 항상 눈에 띄는 서퍼들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생크림 만들기는 매년 해왔으니 어느 정도 자신이 있는 분야였다. 휘핑기가 없어 불안하긴 했지만 팔이 저릴 때까지 휘저으면 어쨌든 만들 수는 있겠다 싶었다. 아침부터 피자 위에 올릴 토핑과 소스를 만들고 빵과 함께 먹을 마요네즈를 만드느라 분주했다. 아르헨티나 청년들의 집에 피자 재료들을 전달하고 나서야 케이크 꾸미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생크림 만들기를 가장 마지막으로 미뤄둔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르헨티나 크림과 에콰도르 크림이 달랐던 것인지, 제대로 휘젓지를 못했던 것인지, 크림은 더 이상 단단해지지 않고 흐물거리더니 급기야 물과 우유로 분리되어 버렸다. 생크림은 일정 시간 휘핑해서 흘러내리지 않을 만큼 최대한 단단해졌을때 휘젓는걸 바로 멈춰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물단지로 전락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요령은 필수다.
생크림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크림 없는 케이크이라니, 새안님의 호통이 귓가에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창밖으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고, 지붕도 없는 해변에 상을 차려야 하는데 비가 오면 어쩌라는 거지, 휘핑크림을 사러 또 어디까지 가야 하나, 눈 앞이 깜깜했다.
부리나케 근처 구멍가게까지 달려가 휘핑크림을 새로 사고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주인 아주머니께 휘핑기가 있는지 여쭤봤다. 아주머니는 주방으로 잠깐 가시더니 몇 달은 쓰지 않은 듯 까만 때가 군데군데 끼여있는 휘핑기를 건네주셨는데 나는 목숨이라도 구제받은 듯 머리를 조아렸다.
그렇다고 두 번째 시도가 성공적이었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휘핑기까지 동원되었건만 생크림은 힘도 없고 각도 잡히지 않은 채 흐물거렸고 나는 또 크림이 분리될까 무서워 휘핑기를 더 휘두르지도 못했다. 식용색소를 동원해 얼추 파란색으로 버무려냈지만 이렇게 흐물거리는 크림으로 어떻게 서핑을 할 만큼 우람찬 파도를 연출해낸단 말인가.
학교가 파하고 새안이는 당당하게 초대 손님들을 이끌고 도착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지만 아이들 중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해변에 있는 오두막 같은 지붕을 겨우 공수해 군데군데 풍선을 매달고 상을 차려놓은 곳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달려갔다.
그런데 아직 빵도, 피자도 도착하지 않았다. 생일 파티를 떠올리며 배고픈 것도 참고 이 순간만을 기다렸을 것이 뻔한 아이들의 눈에 보이는 것은 파인애플, 파파야, 그리고 감자칩 몇 조각이 다였다. 수제 마요네즈가 여러 종류로 세팅되어 있었지만 찍어먹을 빵이 없으니 무용지물이었다. 내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쪼로로 흘렀다.
그 순간 한 아이가, "고래다!"라고 외치며 해변으로 달려 나갔다.
그러자 모든 아이들이 "와!!!!" 함성을 지르며 함께 달려 나갔는데, 어리둥절하게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는 건 나와 몇몇 엄마들 뿐이었다. 아이들이 꼬물꼬물한 손가락을 뻗으며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정말로 고래가 있었다. 비가 와서 신이 났는지 여러 마리의 혹등고래들이 수면 위로 점프를 하고 꼬리를 치켜올리는데 한마디로 장관이었다. 혹등고래는 등에 혹이 있다는 점 외에도 물고기라면 지느러미에 해당하는, 그러니까 팔이 유난히 길다는 특징도 있다. 고래들이 팔을 물 밖으로 높이 뻗어 유유하게 흔드는 것이 보일 때마다 아이들은 고래가 인사를 한다며 함께 응답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피자가 언제 오냐며 입을 삐죽거리던 아이들은 배고픈 것도 잊고 혹등고래들이 보여주는 댄스 공연을 신나게 즐겼다.
약속된 시간보다 한 시간이 늦어서야 아르헨티나 청년들이 도착했다. 커다란 피자를 실은 철판을 앞뒤로 사이좋게 들고서, 목에는 광대 리본을, 코에는 빨간 피에로 고무 코를 달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며, 뛰듯이 춤추듯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피자만 기다렸던 아이들에게 광대 아저씨들의 등장은 선물 같았다. 다 함께 노래를 부르고 한바탕 웃고 나서 맛있는 피자까지 원 없이 먹으니 아이들의 얼굴이 더없이 행복해졌다. 새안이는 말할 것도 없었다. 본인이 구상한 대로 생일파티가 잘 진행되고 있다는 표정으로 친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캠핑버스 안에서는 남편이 바나나와 과자를 잘라 만든 고래 꼬리를 붙들고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초콜릿을 녹여 그것들을 연결했지만 쉬이 굳지 않았고, 케이크 위에 세울라치면 연결 부분이 끊어져버렸다. 결국 수면 위로 솟구쳐 올라야 할 고래 꼬리는 누워있게 되었다.
새안이는 케이크를 점검하겠다며 들어왔는데, 누워있는 고래 꼬리를 보자마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거는 고래 꼬리를 잘라 놓은 것 같잖아! 죽은 고래야!"
"그냥 고래 꼬리 빼."
그 의견에 백번 동의하며 남편은 고래 꼬리를 순식간에 제거해버리고 그 자리에 해변에서 주워왔던 조개와 소라껍데기를 올려놓았다. 새안이는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만하면 되었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Que lo cumpla feliz, Que lo cumpla feliz"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나자 초대 손님들은 작정을 했는지 "Muerda! Muerda! Muerda"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며 분위기를 몰아갔다. '한입 물어라'는 뜻인데, 우리도 그게 뭘 의미하는 것인지 몰라 어리둥절했다. 한 엄마가 설명했다. 에콰도르에서는 주인공이 생일 케이크를 한입 물기 위해 가까이 가면 뒤통수를 밀어 크림이 얼굴에 묻도록 장난을 친다는 것이었다. 새안이는 그 말을 듣고 더더욱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거부했다. 아이들이 몰아가기를 잠시 멈춘 사이, 한 아빠가 새안이에게 "물지 말고 그냥 냄새만 살짝 맡아봐"라고 유혹했다. 긴가민가하던 새안이가 살짝 허리를 굽히고 케이크로 다가간 사이,
PLAP!!!!!!!
옆에 있던 짓궂은 초대손님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임무를 수행했다. 새안이 얼굴은 파랗고 파란 바다로 물들었고, 그 자리에 있던 (새안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얼굴은 크림이 묻어 파랬지만 귀까지 붉어진 것을 보고 새안이가 엄청나게 당황+분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케이크를 잘라 모두에게 나누어주고 아이들이 다시 해변으로 와르르 달려 나간 후에야 뒤에 있는 의자에 앉아 울고 있는 새안이가 겨우 눈에 들어왔다. 새안이 화났어? 하면서 안아주니 서럽게 눈물을 흘리는 여덟 살, 다 큰 아기.
에콰도르에서는 다들 생일마다 이렇게 한대,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은 좋은 일이지, 가볍게 생각하고 웃어넘겨, 애들이 너를 놀리거나 비웃는 것은 아니야....
한참을 아이와 이야기했지만 굳은 표정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생일 파티가 끝나고 저녁이 되어서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그게 무슨 전통이야!! 무례함이지!!!!" 하며 울분을 터뜨렸다. 생일 축하를 하겠다고 전화 온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다가도 닭똥 같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나와 남편은 그런 아들의 모습이 웃기면서도 안타까웠다. 당황하는 나를 보고 모두가 깔깔거리며 웃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사실 어른에게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맛난 음식에 혹등고래 쇼까지 동원된 생일파티였지만 주인공에게는 충격적인 하루였나 보다.
남편은 아들이 안쓰러웠는지 옆에 누워 계속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새안이는 까무룩 잠이 들듯 눈을 감고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