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시 45분, 빵장수 오토바이의 경적 소리가 들린다.
눈곱도 떼지 않은 얼굴로 캠핑버스를 박차고 나간다. 빵장수 아저씨는 이런 몰골에도 싫은 내색 없이 따듯한 빵을 건넨다. 하루 중 처음으로 손에 닿는 온기. 빵 한 봉지만 있으면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다. 언제든 배고프다 칭얼대는 아이들을 선방할 수 있으니까.
아직 아침도 먹기 전이지만 머릿속은 냉장고를 중심으로 스캔 작업이 시작된다. 큰아이가 학교에 가져갈 도시락으로 뭘 준비하지, 점심과 저녁으론 뭘 해 먹지, 오후에 애들 간식으로 뭘 해주지, 부족한 재료는 없나, 뭘 사러 가야 하나.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라면 알 것이다. 무한한 욕구와 필요로 점철된 우리의 아이들, 배고픔과 지루함을 못 견디는 어린 존재들을 보필하는 데엔 그만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마련이다.
어린이집도 베이비시터도, 할머니 찬스도 없는 여행에서 나의 하루는 아이들을 돌보는데 온전히 바쳐진다. 언젠가 친구가 했던 말이 생각난다.
"여행이 어디 여행이니? 여행지에서 애들 보는 거지."
단 한 시간의 자유 시간도 없는 일상.
힐링, 휴식, 재충전과는 거리가 먼 여행.
밤이 되면 막내와 함께 골아떨어지는 하루하루.
여행을 하다 만나는 커플 여행자들, 조그만 벤을 집처럼 꾸미고, 아이 없이 고양이 한 마리 데리고 여행하는 사람들. 노곤한 밤엔 둘이 손잡고 나가 해변에서 맥주캔을 기울이고, 배가 고프지 않을 땐 망고 한 조각으로 끼니를 때우기도 하는 그들. 처음에는 그런 커플들이 참말이지 부러웠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오후에는 베이비시터를 고용해서 적당히 놀게 하고, 내 시간을 만들고, 일도 하고, 취미 생활도 하고, 그렇게 살아도 되었을 것을, 왜 두 아이를 끌고 여행을 떠나 와서 생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가끔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올 때도 있다.
여행을 시작하면서 가지고 있었던 걱정거리도 대부분 아이들에 관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이동하며 사는 생활의 리듬을 못 따라오면 어쩌지?
부모 좋자고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것은 아닐까?
아홉 살, 열 살만 되어도 자기 또래들과 노는 것을 원할 텐데 새안이와 하누가 커서 우리와 여행하기 싫다고 하면 어쩌지?
이렇게 여행하며 붙어 있는 시간이 오히려 아이들과의 관계를 나빠지게 만들면 어쩌지?
자신들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왜 여행을 하게 만들었냐고 원망하면 어쩌지?
아이들에 관한 한 나는 자신이 없었다. 나에겐 좋았던 기억이 다른 누군가에겐 최악의 기억이 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남미에는 페루의 마추픽추,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 같은 굵직굵직한 관광지들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서도 마추픽추는 페루를 여행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는 필수 코스였다. 비용이 많이 들기로도 유명한 곳이지만 아무리 돈이 없는 여행자라고 해도 마추픽추를 건너뛰는 법은 없었다.
마추픽추를 가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두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가거나 일곱 시간 버스를 타고 내려서 십이 킬로미터를 걸어야 한다. 기차표 값은 일인당 140달러를 웃돌았다. 걷지 않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금액이 만만치 않았다.
우리의 관건은 십오 킬로가 넘는 아기를 업고 걸을 것인가 말 것인가 였다. 어린 아기와 비좁은 버스를 타고 일곱 시간을 가는 것도 모자라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십이 킬로미터 산길을 걸어야 한다고? 나는 애를 업고 그 거리를 걷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물론 두 시간 기차를 타기 위해 거금을 들여야 한다는 사실에는 속이 쓰렸지만, 그 돈을 아끼자고 그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싶었던 것이다. 쿠스코에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는데도 나는 마추픽추 문제로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아이를 데리고 가야 한다는 것, 아이의 무게를 내가 오롯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 아이의 기분과 찡찡거림의 정도에 따라 나는 뒤집혔다 매쳤다 하는 빈대떡만도 못한 존재라는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막무가내 기질은 어김없이 발휘되었고, 우리는 버스를 타고 십이 킬로를 걷는 그 순례자의 길을 선택했으며, 막둥이는 버스에서도, 산길에서도 단 한 번도 울거나 징징거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냥 무사히 다녀온 정도가 아니라 그 십이 킬로 길을 걷지 않았으면 어쩔 뻔했냐며 우리는 즐거워했다. 마추픽추가 절반의 감동도 없이 그냥 유명한 관광지 방문으로 끝날 뻔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마추픽추 여행 후에 비로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을.
부모가 선택해서 우연처럼 주어진 여행이지만, 그 또한 자신들의 인생에 준비되어 있던 운명 같은 길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아이들은 그 운명 안에서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기질을 마음껏 발휘하며 여행을 해나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아이들의 여행을 주도한 장본인들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여행길에 보호자로서 밥숟갈을 얹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우리의 돌봄을 필요로 할 만큼 약하지만, 그들의 삶에 있어서는 충분히 강하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우리가 아이들의 무게를 이고 지고 갔던 것이 아니라 그저 동반자로서 함께 길을 걷고 산을 올랐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힘들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그만큼 깊고 넓다.
세상을 절대적으로 순수한 눈으로 바라보는 일에 우리를 초대하는 아이들이 있기에,
모래를 만지고, 돌을 맨발로 밟고, 물 위로 솟는 고래에 환호하며,
살아있음을 일깨우는 이 아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여행은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더 달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들이 없는 곳으로 숨고 싶다가도 바보 웃음을 짓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