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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 백 Jan 09. 2019

.과거過去 - The past.(feat. 새해인사)

잠깐만 서서, 가만히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먼저 새 해 인사를 드립니다!!!

2019년 새로운 한 해 동안,
많은 독자님들의 마음이
여러 작가님들의 아름 다운 시선으로
가득 채워지길,
바라봅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셔요!!!!!!! :D











.과거過去 - The past.

과거(過去, The past) | 2018_0918104038 | Digital Photo | LG-F160K | 2448 x 3264 pixel


.삼백예순다섯 번의 과거가, 앞에 놓여 있다. 잠깐만 서서, 가만히 바라본다.






+

노인의 작업실을 나와 오른쪽으로 몇 걸음 가다 보면, 서재가 있을 거라는 말이 떠올랐다. 서재. 누군가는 책을 가로 눕혀 놓는 것이 책을 보관하는 정석이라고 하지만, 다른 책 위에 가로누워 있든 서로를 의지한 채로 함께 모여 서 있든,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모여 있는 책들의 모습에는 알 수 없는 매력이 서려있다. 단순한 안정감만이 아닌, 어떤 미세한 흥분을 갖게 하는 힘. 그 힘이 서재라는 곳에 있다.


서재임에도, 따로 문이 없는 방으로 들어선다. 작업실만큼이나 햇빛이 환하게 들어오는 곳. 의외다. ‘해가 방에 들어오면, 책이 상할 텐데 …….’ 게다가 노인의 서재는 기대만큼 크거나 어떤 예술가로서의 위용이 느껴지는 곳은 아니었다. 흥분보다는 왠지 모르게 차분해야만 할 것만 같다. 그래서일까, 문득 실제로도 마음이 차분해짐을 느낀다. 그렇게 차분해진 마음은 맑은 차 한 잔을 마신 듯 정신을 명료하게 만들어갔다. 그렇구나. 조금은 노인의 의도를 알 듯하다.


책상 위에는 성경 한 권이 놓여있다. 그 외의 다른 물건은 아무것도 없어 깨끗한 빤빤함이 널찍했다. 작업실을 보면 결벽증은 아닌 것 같은데 ……. 대비되는 두 곳의 모습에 웃음이 난다. 마치 편견에 생긴 균열 사이로 겸연쩍게 새어 나오는 정신처럼. 자세히 보니 성경 아래에 얇은 책 한 권이 있다. 오래된 것이 확연한 청록색 저널. 표지엔 아무런 제목이 없다. 그러나 오른쪽 하단에 반듯하게 적힌 노인의 필명이 이 저널의 소유자를 명확히 밝히고 있다. 책 아랫면을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적당히 갈라서 펼쳐 본다.



“잠깐 서서, 가만히 바라본다. ‘해’가 지나간 자리. 그 삼백예순다섯 번의 과거가 앞에 놓여 있다. 그림자가 채워진 날들보다 그렇지 못한 날들이 많다. 해와 함께 한 날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은 언제나 환한 미소를 가지고, 매번 작은 창을 통해 방으로 찾아왔다. 하지만 그 미소가 아름다울수록 나는 더욱 슬퍼졌고, 그래서 더 미안했다. 오랜 수면 뒤의 육체와 정신이 삶의 초점을 바로 잡는 일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먼저 몸을 추슬렀다. 무릎을 펴고,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들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상당한 시간이었다는 것, 그것만을 무겁게 인식할 뿐이다. 그렇게 겨우 서서 걸을 수 있게 됐을 때, 나는 내가 무인지경無人之境 한 복판에 서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잠들어 있던 시간 동안 과거는 허물어져 갔고, 시대가 머물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허물어진 과거와, 비어버린 시대 위에는, 현재가 설 자리가 없었다. 또한 자신이 서있는 곳이 어딘지 알 수 없었으므로, 어디로 가야 하는지도 역시 알 수 없었다. 해는 날마다 그림자로 가야 할 방향을 일러주었지만, 시시각각 방향이 변하는 그림자는 붙들어 멈출 수도 그 변화를 이해할 수도 없었다. 어디로도 갈 수 있으면서도 동시에 어디로도 갈 수 없는, 비현실적 현실. 그것은 감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려면, 이제 정신을 추슬러야 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기 시작했다. 허물어져 흩어진 과거의 파편을 다시 모으고 벽돌을 쌓듯 그리고 퍼즐을 맞추듯, 파편 하나하나 마다 삶의 의미를 발라 분절된 시간들을 이어 붙인다. 가능한 날은 이어진 시간들을 해에 비춰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자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이 현실을 벗어나 삶에 도달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는 못했다. 스스로의 힘만으로 중력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하지만 움직이지 않으면 시간을 흐르게 할 수 없다. 시간이 흐르지 않으면, 미래는 결코 오지 않는다. 그러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누군가의 메아리가 들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갈 수 있는 곳으로 할 수 있는 만큼, 미약하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뎌 미래를 끌어당기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렇게 나는,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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