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 저금통 채우듯
"Isn’t it funny how day by day nothing changes but when you look back everything is different."
재밌죠, 매일 아무런 변화도 없었는데 돌아보면 모든 것이 달라져 있다는 게.
- C. S. Lewis
올해부터 3년 다이어리를 쓰기 시작했다. 출판사 북클럽 가입 선물로 받은 연두색 표지의 두툼한 양장 노트를 펼쳐보니 한 페이지당 날짜 하나, 연도가 세 개 적혀있었다. 모양이 취향에 잘 맞아서 쓰고는 싶었으나 이미 일기장은 따로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하루동안 감사했던 일이나 행복감을 느꼈던 순간들을 짧게 적어보기로 했다.
평소 쓰는 일기에는 좋았던 일뿐만 아니라 고민거리나 기분 상했던 일도 기록한다.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면 이미 해결된 문제는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때로는 당시의 부정적인 감정이 되살아나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 3년간 펼쳐 볼 다이어리에도 그대로 적는다면, 의도치 않게 지금의 내가 미래의 나에게 괜한 일을 상기시켜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이었다.
자기 전, 노트를 펴놓고 손가락으로 볼펜을 굴리며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는지 되짚어 본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 엄청난 행운은 없더라도 소소한 행복은 분명 존재한다. 가령 점심으로 먹은 수제비가 괜찮았다, 퇴근하며 버스 시간이 잘 맞은 덕분에 집에 일찍 도착했다, 강아지와 밝은 낮에 산책하니 귀여운 모습이 눈에 더 잘 들어왔다와 같은 것들이다. 기록할 거리를 찾지 않았다면 지나쳤을지도 모를 작은 순간을 떠올리며 좋았던 감정을 다시 경험한다.
또한 이 다이어리를 쓰는 동안에는 같은 일도 긍정적으로 보게 된다. 얼마 전, 말린 대추야자를 인터넷으로 주문했으나 다른 집에 잘못 배송되었다. 다음날 조회를 하고서야 알게 되어 택배 기사 분께 연락했고, 그렇게 찾은 대추야자는 달고 맛있었다. 그날 밤 다이어리에 그 맛을 묘사하며 ‘택배가 어쩌다 거기로 갔을까’ 대신 ‘무사히 찾아서 다행이다’라고 적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이렇게 하루 이틀, 일 년 365일, 아니 3년이므로 1,095일을 보내면 분명 나에게 주어진 상황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일상에서 항상 긍정적인 일만 이어지면 좋겠지만 부정적인 일도 발생하기 마련이다. 외부적 요소는 어쩌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나의 몫이다. 스트레스 자극에 대하여 어떠한 방향으로 생각하는가에 따라 대처 방식이 달라지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능력, 회복 탄력성에도 영향을 준다.
연초에 어떤 한 해를 보내고 싶은지 이야기하다가 공부에 조금 더 신경쓰고 싶다고 했더니 지인이 말했다. “보통 피부는 어떻게 하는가가 나중에 보인다고 하잖아요. 10대는 원래 피부가 괜찮지만 그동안 관리한 게 20대에 나타나고, 20대에 한 건 30대에 드러나고요. 40대에도 30대에 잘 관리하면 피부가 좋다고 하더라고요. 공부도 그런 것 같아요. 지금 당장은 눈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하고 안 하고는 10년 후가 다를 거예요.”
자기개발을 꾸준히 해야겠다 마음 먹다가도 과연 그런다고 변화가 생길까 하는 의문이 한 편에 자리잡고 있던 나에게 도움되는 말이었다. 특별한 재능은 숨겨진 건지 없는 건지 어른이 된 지금까지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그나마 성실함을 밑천으로 삼고 있다.
너무 큰 목표나 무리한 계획은 부담스러워서 시작이 어렵기 때문에 일 년을 월로 나누어 작은 목표를 세운 뒤 주 단위로 하면 되는 일과 매일 할 일을 분리한다. 날마다 하는 일은 되도록 별도로 시간을 내기 보다 일과 중에 넣어 습관처럼 하려고 노력하는데,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할 때나 청소할 때, 혹은 이동할 때 영어 뉴스를 듣는다. 간단하고 무겁지 않게 최신 소식을 전하는 20분짜리 뉴스로 선택해서 반복 재생하고 있다. 물론 매번 집중하기도 어렵고 음악처럼 틀어놓을 때도 많지만 이미 습관이 되어서 듣지 않는 날은 허전하다. 그저 스쳐가는 시간 동안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가 좋다. 반드시 공부가 아니라 해도 이처럼 일상 중간에, 그리고 허무하게 흘러갈 하루의 일부를 내어 관심 있는 활동을 하다 보면 지금은 별 거 아닐지라도 10년 후 그만큼 늘어있을 것이다.
“그럼 시간을 믿어봐. 시간이 자네 편인 날이 와. 시간이 자네의 힘이 되는 날이 온다고.”
- 신유진, 《상처 없는 계절》 p.94
늘 하던 글쓰기에 불안감을 느낀 작가에게 오랫동안 구두 수선을 해온 분이 건넨 말이다. 이에 작가는 재능을 타고난 천재이기 보다 시간으로 완성하는 장인이 되고 싶다고 썼다. 어제와 별 다를 것 없는 하루인 것 같아도, 작년 오늘의 나와 비교하면 어딘가 달라져있다. 아마 내년 오늘의 나도 그렇겠지. 이왕이면 바라던 모습을 향해 서서히 닮아가고 있었으면 한다. 묵묵히 시간을 쌓아올리는 장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