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언제였더라. 션이 물었다. 일하면서 언제 가장 좋냐고.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뉘앙스는 '일하는 데 가장 동기부여해주는 요소가 무엇이냐' 하는 거였다. 그때 내 대답은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신뢰 받는 것-이었다. 지금 똑같은 질문을 다시 들어도 나는 같은 대답을 할 것이다. 신뢰 받는 것.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획자라고 생각되는 것이 나를 가장 신나게 만든다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만큼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의존한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나는 어떤 사적 관계의 거리나 인간적인 매력 같은 것과 별개로 '신뢰할 수 있는 한 명의 기획자'가 되는 건 여전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M/M(man-month)'라는 단위를 입사 직후 현지 언니에게 처음 들었다. 원체 그런 식으로 인력 산정을 철저하게 하던 곳에서 경력을 쌓은 사람이라 입에 붙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쓴 표현이었는데, 정확한 의미는 몰라도 맥락상 업무당 리소스를 계산하는 단위이겠거니 하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 후에 일에 차차 적응하면서 프로젝트에 들어갈 때마다 직군별로 필요한 R&R을 계산하고 리소스를 요청하는 과정을 겪었다.
학교 다닐 때 인적자원관리(Human Resource Management) 강의도 들었지만 그땐 '사람 = 리소스' 라는 개념이 살갗으로 닿을 시절은 아니었다. 그런데 나도 그 '리소스'에 포함되는 한 사람이 되었다는 자각이 생기니 '아, 1인분의 몫은 해내야 하는데...' 하는 강박이 들기 시작했다. 시니어와 페어를 뛸 때도 '내가 좀 더 잘 할 수 있으면 굳이 안 봐주셔도 될텐데' 하는 생각을 했고, 디자이너나 개발자와 원활하게 업무 협의가 안될 때 다른 시니어 기획자들에게 의견을 구하거나 리더 테이블로 아젠다를 올리면서도 스스로 몫을 다 하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빠졌다. 연차에 비해 잘 하고 있다-라는 이야기를 들어도, 주어진 미션을 수행하려면 '연차에 비해'라는 조건문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타고나길 남에게 손 벌리기 싫어하고 폐 끼치는 건 죽어도 싫은 성향이다. 그러니 일을 할 때도 아직 덜 여문 나의 역량 때문에 팀이 발목 잡히는 기미가 보인다고 생각하면 너무나 괴롭다. 어쩌면 이것은 일할 때 내가 느끼는 가장 큰 공포다.
그와 반대로 누구보다 가장 긴 시간을 함께 보내고, 가장 밀착하여 일에 대한 생각을 나누고 있는 동료들의 기대 섞인 신뢰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성장하게 자극한다. '기대'하는 것과 '예상'하는 것은 다르다.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보다는 한 발 더 앞서있는 비전과 같은 것이 기대라고 생각한다. 더 많은 긍정적인 기대를 받고 싶다. 어떤 과제가 주어지든 함께 걸을 수 있는, 함께 걷고 싶은 기획자라고 생각되었으면 좋겠다.
내게 질문했던 그때, 션은 우리 서비스를 통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고 다양한 기회를 얻고, 삶에 의미있는 변화를 겪게 되는 사람들을 볼 때가 가장 좋다고 했다. 일하는 힘이 난다고, 더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고. 올해는 션의 눈으로도 일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겠다. 바구니 하나에 달걀을 다 담는 게 위험한 일이듯, 내게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다른 요소를 조금 더 찾아보는 게 좋을 테니까. 그러면 좀 더 건강하고 씩씩해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