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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Mar 24. 2019

산책

경복궁의 광화문(남), 영추문(서), 신무문(북), 건춘문(동)



날이 적당한 간절기, 또는 밤이 선선한 여름이면 퇴근길에 광화문을 지나고 영추문 옆길을 따라서 집으로 걸어온다. 경복궁의 서쪽 동네 '서촌'에 살아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것 중 하나다. 예전에 잠시 북촌에 살았을 때는 건춘문, 그리고 그 너머의 국립민속박물관 건물도 종종 보았다.

종로에서만 서울살이 거의 10년을 하는 동안 육안으로 못 본 것이 하나, 경복궁의 북문인 '신무문'이었다. 그 10여년 전 효자동 유니세프 건물로 매주 다니던 시절에 영추문 길로 조금만 올라가면 "무슨 일로 오셨어요?" 묻는 사복 경찰이라든가, 이모부의 차를 타고 삼청동 길로 올라가려다 보면 보이는 검문소라든가 하는 게 '저기는 청와대 근처라서 못 가는가 보다' 하고 생각하게 한 것이다. 경복궁 안쪽에선 볼 수 없을까 싶어도 향원정 너머로는 매번 공사 중이라고 막을 쳐놔서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어제. 계절과 상관없이 선선한 밤 바람에 산책을 하는 게 지금 내 컨디션에 좋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다시 영추문 옆길로 나갔다. 광화문과 청계천 일대를 걸을까 생각하며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청와대 앞길을 개방했다는 기사를 봤던 것도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초록불이 켜지고 길을 건너 차분하게 좌회전하여 궐담을 따라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약 50m 마다 선 경찰들 중 누구도 어디 가시냐, 무슨 일로 오셨냐, 신분증을 보여달라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걷는 동안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도 몇 마주쳤다. 신무문 앞에 다달아서는 이미 찬바람에 빨갛게 부은 볼이 더 빨개지도록 흥분 상태로 핸드폰 카메라를 켰다. 바로 아래에 서 있던 경찰은 앵글에 걸리지 않도록 주춤주춤 자리를 옮겨 피해줬다. 이게 신무문이구나 하는 감상에 속으로만 팔짝팔짝 뛰면서 앞에 있는 안내판을 보려고 몸을 틀었는데 청와대 배경으로 사진 찍기 가장 좋은 스팟이라고 써 있어서 고개를 들었더니 주홍색 조명을 받고 있는 청와대가 눈 앞에 펼쳐졌다. 묘한 기분이었다. 내 눈으로 보는 날이 있을까 싶던 것들이 몇 초 간격으로 나타났으니 말이다.

두근거리는 가슴팍을 꾹꾹 눌러가며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기는 동안 작은 샛문도 두 개 봤다. 한자를 읽을 줄 몰라서 그게 무슨 문인지 알 수 없었다는 게 아쉽지만 어쨌든 북쪽으로 그런 게 나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청와대 춘추문을 보고 "오, TV에서 보던 거...!" 라고 탄성을 지르고, 언덕진 길을 내려오는 동안은 오랜만에 녹색 조명이 들어온 N타워도 봤다. 유난히 담이 높아 보이는 건춘문 주변을 지나고, 매일 저녁 조명을 밝혀두는 광화문을 오래도록 올려다보다 다시 서쪽의 영추문까지 마저 살피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걷고 나니 약 1시간, 걸음은 8천보쯤 된다.

아마 앞으로는 종종 밤에 경복궁 담벼락을 둘러둘러 걸을 것 같다. 늦은 시간이라 다니는 사람이 적어 조용하고 차분하며, 그럼에도 자리를 지키고 선 경찰과 경호원들 덕분에 무섭지 않다. 오늘도 한바퀴를 돌고 왔다. 다음에는 북촌 사람 마틴한테 같이 걷자고 불러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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