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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랑 Apr 18. 2019

설레니까 버릴 수 없는 것들

마티는 수시로 책이나 음반을 선물해줬다. 함께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오면 사두고 내가 먼저 읽을 수 있게 기다려주기도 하고, 자신이 이미 읽은 책을 내게 물려주기도 했다. 길을 가다 음반점에서 나오는 팝을 둘 다 듣기 좋아하면 바로 들어가서 그 음반을 사서 들려줬고, 이미 품절된 음반 중 소장하고 있는 것을 빌려주기도 했다. 헤어질 즈음에는 내 방에 있는 책과 음반들 중 어디까지가 내가 지불한 몫이고, 어떤 것이 마티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며, 어디부터가 마티에게 돌려줘야 할 '빌려준 것'에 해당하는지 모호했다.

내가 아마도 죽을 때까지 몇십 개쯤은 소장한 채 살아갈 것이라 예상하는 책이나 음반은, 당장 읽거나 듣지 않아도 언젠가 내게 어떤 감상을 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있다. 그러니 얼마든지 품고 지내고, 처분이 필요한 시점에는 적지 않게 고통스러워하며 선별 작업을 하는 대상이다. 마찬가지로 이별 후의 그 선별 작업은 아주 많이 고통스러웠다. 반 박스 정도로 추려서 보내면서도 개중에는 내게 선물한 것이라며 남겨둘 수 있게 하던 것까지 말이다.

그렇게 마티의 흔적이 남겨뒀던 공백도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은 다시금 가득 메워졌다. 예전만큼 책을 읽어내거나 오디오로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는데다, 쌀쌀한 바람이 불면 내 방 대신 sis의 빈 방에서 계절을 나려니 그것들에 대한 감상을 떠올리는 일이 멀다. 그러다 간혹 방 한 켠에 음반 수백 장과 오디오를 마주하면 기분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느릿하게 뛰는 심장박동을 느낄 수 있다. 내가 나를 자각하는 순간이 온다.

기억력이 좋지 않다. 좋은 기억도, 슬픈 기억도, 모두 잘 잊고 산다. 자기 방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 중에 잊고 싶지 않은 추억을 조금씩 꺼내 먹고 살려면 그것을 소환할 버튼이 필요하다. 어떤 장소에서 들었던 음악이, 어떤 감정에 휩싸여 지낼 때 읽었던 책이, 어떤 계절에 바람에 실려왔던 향이, 어떤 시간에 한참이나 바라봤던 하늘의 색이- 어두운 거실 저편의 내 방에는 그러한 버튼 여럿이 숨 죽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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