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rtur Voznenko, Unsplash
나는 오늘도 무언가를 보고, 듣고, 읽었다. 작품의 장르와 매체는 다양했지만, 나의 선택은 늘 한 가지 기준을 따른다. 바로 ‘취향’이다. 취향에 맞지 않는 매체를 억지로 소비하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기에, 내 서재와 재생 목록에는 나의 관심을 오랫동안 붙들어 두는 작품들로 가득하다. 그래서 같은 드라마를 10번 넘게 보기도 하고, 몇 년이 지나도 다시 찾아보는 책이 존재한다. 내가 선택한 매체는 나에게 안정감을 주고, 그 속에서 느끼는 친숙함은 나의 가치관과 선택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이런 나도 가끔은 취향 밖의 작품, 명작으로 불리는 것들에 잠시 관심을 갖는다. 호기심에 읽기 시작해도 대부분 끝까지 읽지 못한다. 나의 취향을 사로잡는 것이 따로 있기 때문이다. 내가 끝까지 몰입하게 되는 작품은 주로 아무 기반도 없는 주인공이 필요한 것을 하나씩 익히며 성장해 나가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비록 특별한 재능이나 배경이 없더라도, 노력하고 배우며 점차 원하는 사람으로 변모해 나가는 그런 과정에 나는 온 마음을 쏟는다. 이런 소설이나 영화는 반드시 정주행 하게 된다. 왜일까? 어쩌면 주인공처럼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그들과 같은 성공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주인공이 필요할 때마다 적절한 사람을 만나고, 그들에게 인정받으며 그들의 재능을 공유받는 관계의 과정이다. 주인공이 성장하며 주위 인물들과 상호작용을 통해 서로의 가치를 인정받는 그 장면을 바라볼 때, 나는 무언가 따뜻하고 충만한 감정을 느낀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러한 관계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외로움을 느낀다. 사람을 만나지 못해서가 아니라, 스토리 속에서 볼 수 있는 진정한 관계를 현실에서 경험하지 못해 느끼는 외로움이다. 이 때문에 현실보다 허구의 이야기 속에서 더 큰 만족감을 느끼고, 명작이라 평가받는 작품도 이런 취향에 맞지 않으면 오래 곁에 두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취향이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동시에 한계가 될 수 있음을 느끼기도 한다. 나의 좁은 취향의 세계는 늘 비슷한 유형의 작품에서만 위안을 찾게 한다. 현실에서도 나를 인정해 주고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만들고 싶지만, 아직 허구의 이야기에서만 찾는 듯하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마도 한 발짝 내디뎌 내 취향 바깥의 세계와 관계에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관계라도 용기를 내어 다가가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야 한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주는 의미에 조금씩 가치를 부여하며, 나만의 성장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고자 노력할 때, 스토리 속 대리만족을 넘어서 실질적인 관계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취향은 나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거울이자, 나를 드러내는 방법이다. 취향 속에 갇히지 않고 그 너머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나만의 기준을 세우면서도 다른 이들의 가치와 재능을 받아들이는 용기 역시 필요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나의 선택이 확장되고, 나의 가치관 역시 더욱 풍부해질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