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ke to vs. Need to
어린 시절, 어머니는 지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리고 있었다.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의 결과치고는 너무 가혹했다.
어쩌면 내 피 속에도 그런 학대의 유전자가 흐를까 걱정될 정도로.
그걸 어린 나도 어렴풋이 느꼈을까.
어머니는 내 손에 그림책 몇 권을 쥐여주고 주방으로 향했다.
하루에도 밥상을 여섯 번, 일곱 번 차려야 했던 시절.
한참 바쁘다가도 문득 너무 조용해져 방을 들여다보면,
그림책을 뒤적이던 내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이런 애라면 셋도 키우겠더라”는 말을 곧잘 하셨다.
내 독서의 시작은 누군가의 고난에서 비롯됐다.
그리고 그 이후, 책은 내게 두 개의 얼굴을 드러냈다.
읽고 싶은 책과 읽어야 할 책.
이 두 감정은 늘 대립했고, 그 싸움은 직장 생활 내내 이어졌다.
음악이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통로라면,
독서는 또 하나의 축이었다.
읽고 싶은 책은 늘 강했다.
첫 페이지부터 멱살을 잡고 끝까지 끌고 갔다.
그 시절 《영웅문》(지금의 사조영웅전 시리즈)은
잠을 포기할 만한 책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반면 읽어야 할 책은 책임이었다.
지식 노동자에게 ‘읽지 않음’은 퇴보였으니까.
책상 앞에 앉으면 먼저 필요한 책을 펼쳤고,
집중이 어느 정도 오르면,
머리 한켠에서 미처 끝내지 못한 이야기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대결의 서막이 열렸다.
그래서일까. 내 방의 벽 네 개 중 두 개는
책장이 차지했다.
당시엔 읽을 책은 ‘사는 것’이었고,
그게 일종의 책임처럼 느껴졌다.
지금은 다르다.
전자책, 도서관 대여를 활용한다.
두 번 이상 읽지 않을 책은 과감히 떠나보냈다.
홀가분해졌지만, 내 안의 대결은 여전히 계속된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책을 읽을까?
읽고 싶은 책은 여행이다.
일상을 벗어나게 한다.
읽어야 할 책은 욕구에 기반한 필요다.
마케팅, 전략, 이슈 트리, 엑셀은 살아남기 위한 도구였고,
《사피엔스》, 《이기적 유전자》, 《논어》, 역사책들은
알고 싶다는, 더 알고 싶다는 욕망이었다.
인간은 자연에서 가장 약하다.
하지만 총을 들고, 도구를 만들고, 지식을 쌓으며
지구의 최상층으로 올라왔다.
살아남기 위해 지식이 필요했고,
어울려 살기 위해 앎이 필요했다.
스스로의 힘, 협업의 힘, 조화의 마음.
그 세 가지는 인간 사회를 살아내는 3가지 힘이다.
인권이 강조되는 이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선
몸도 마음도 단단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읽는다.
읽고 또 읽는다.
“이거다!” 싶은 책은 몇 번이고 다시 읽는다.
읽은 것을 현실에 옮기고,
반복을 통해 지혜를 쌓는다.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재미있게 살기 위해.
나는 여유 있는 사람을 좋아한다.
문제 앞에서 당황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하는 사람.
그들은 내 이상형이다.
죽기 전에, 그 손끝에라도 닿을 수 있을까.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책장을 펼친다.
읽고, 또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