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음악을 듣는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슬픈 발라드를, 혹은 전력질주 하는 락을 튼다. 볼륨은 높아지고, 마음은 잠시 내려앉는다.
상황에 따라 장르를 변경한다.
일할 땐 좋아요 표시한 곡을 무작위로 틀어둔다. 음악보다는 일에 집중하는 시간이다.
출퇴근길엔 다르다. 추천 목록을 훑고, 떠오르는 곡을 하나 재생하면 그에 어울릴 다음 곡을 검색해 대기열을 채운다.
이때 대부분의 재생목록이 만들어진다.
일상에서는, 식사를 준비하거나, 설거지를 할 때, 청소를 할 때, 그리고 자기 전에 음악을 튼다.
대부분, 좋아요나 즐겨찾기 한 음악을 랜덤으로 재생한다.
음악에 귀를 기울인다기보다, 귀를 막고 일상의 일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나의 음악 저장 기준
처음엔 그냥 좋아서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어떤 곡은 자꾸 듣고 싶고, 어떤 곡은 금세 질렸다.
이 반복 속에서 내 나름의 등급 기준이 생겼다.
사실, 등급을 갖는다, 더 좋은 것을 가장 좋은 위치(찾기 쉬운 곳)에 둔다는 번거롭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좋아요 혹은 즐겨찾기 폴더에 한꺼번에 집어넣고 무작위로 듣는 것이다.
하지만, 간단한 만큼 뭔가 부족하지 않나? 이것은 나의 습성 문제일 테지만.
음악 감상의 3 단계
선택이든 추천이든, 음악을 듣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림은 보는 것부터 시작하겠지.
가사집을 먼저 읽어본다거나, 곡 개요, 프로필 등을 먼저 읽지 않는다. '아! 신곡 나왔네. 듣자!' 이런 느낌.
선입관도 선입관이지만, '타인이 뭐라든' 내 취향에 맞나, 맞지 않나 가 가장 중요하다.
관련 정보를 사전에 보지 않음은, ‘모두 입 좀 닫아 주세요. 내가 지금 음악을 들으려 하거든요! 쉿!' 이런 의미다.
1. 처음 듣는다 → verse 통과 못 하면 skip
2. 중간 반복부 전 판단 → 통과 시 '완창'
3. 평가 기준: 5점 만점의 상대 평가 방식
- 즐겨찾기 (3점)
- 재생목록 등록 (4점)
- SNS 공유 (5점)
편식의 미학
가입한 스트리밍 서비스의 특성상, '즐겨찾기'를 선택하면 보관함에 자동 저장된다. 별도의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지 않아도 좋아하는 곡을 다시 들을 수 있다. 왜 이런 수고를 하고 있을까?
내가 고른 음악을 다시 듣는 순간이 맛있기 때문이다.
공식적이진 않지만, 등수를 매겨 기록해 두기 때문에, 웬만큼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 보관함에 남을 수 없다. 그러니 다시 들으면 맛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엄선한 작품이 내게 주는 선물이다.
내가 고르는 기준은 또한 이렇다. 음악이 신선하게 (unique but fun) 들리나? 어깨가 움직일 정도의 리듬감이 있나? 자연발생적으로 몸이 반응하게 되면, 다시 들을 음악의 반열에 오른다. ‘한 곡 반복 듣기’의 수준이라면, 내 등급에서 왕좌에 오른 음악이다. 이런 등급의 음악은 비상기 기억으로 떠오른다. 그럼 또 듣는 것이다.
적어도 내 취향에서의 등급 높은 음악이니 이렇게 맛있는 지도 모른다.
맛있는 음악은 자꾸 듣고 싶다.
매일 수 천곡이 발표된다.
지치지 않고 기록한다.
이런 과정의 선순환이 맛있는 순간에 필요한 준비다.
오래간만에 먹는 음식이 맛있듯 음악도 그런가 보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 맛있는 시간을 얻기 위해 듣고 기록한다.
감정 여과 장치로서의 음악
편식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지독히 편식한다.
좋은 음악만 남겨 반복해 듣는다. 그게 나만의 독특함은 아니겠지만, 나름의 고집은 있다.
'지독한 편식'이라는 의미는 이렇다.
호기심에 입에 넣어, 맘에 들면 몇 번이라도 먹는다.
그렇지 않으면 바로 뱉고 안녕을 고한다.
판단이 빨라야 서로 상처가 없다. 물론 저작권자들은 내가 이런 줄 모르겠지만.
스트리밍 서비스의 장르 구분 중에, 듣지 않는 카테고리가 10개 중 2개 정도다.
신기한 것은, 업계 장르 구분과는 무관하게, 기록한 음악은 유사하게 들린다.
아마도 그 기준이라는 것, 나의 등급이라는 것이 나의 감정에 핵을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은 호불호가 뿌리다.
좋아하는 것이 가까워지면, 기분이 좋아지고 말투가 순해진다.
싫은 것이 가까워지면, 기분이 나빠지고 말투가 굳는다.
다시 말해서, 희로애락이 탄생하게 된다.
내가 음악을 여과하는 과정에서 느끼는 감각도 동일하다.
좋으면 가까이 두고, 싫으면 멀리한다.
간혹 싫었던 것이 좋아져 곁에 두기도 한다.
이런 순간의 발생 빈도는 낮다.
대신, 이런 속성 때문에 타인이 보기에 나는 일반인 같지 않을까?
'좋음'은 지금 좋다는 의미다.
내 정신적 육체적인, ‘지금’의 상태에 '좋게 들린 음악'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기반이 되는 '내 상태'가 변하면, 마음에 든 음악이 나가고,
마음에 들지 않던 음악이 들어온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정리하면, 나에게 음악이란 무엇일까?
지금 생각하기로는, 촉진제다.
무엇의 촉진제일까?
언젠가 퇴근길, 성시경의 ‘차마’를 들었다.
추억은 떠오르지 않았다. 묻어두었던 아픔이 먼저 고개를 들었다.
순간 눈이 뜨거워져, 사람들 사이에서 어쩔 줄 몰랐다.
이럴 때 음악은 말보다 앞서 내 마음을 꺼낸다.
어떻든, 음악은 내 일상의 일부이자 내 마음의 일부다.
감정이 출렁이는 순간마다, 그 곁엔 음악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다시 듣는다.
내 감정과 연동되는, 내 몸의 연장이다.
또 하나의 퍼즐 조각, 음악.
어쩌면 가장 먼저 찾아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영화보다, 책 보다 가까이 두고
손에서 놓지 않는데 말이다.
소중한 것일수록, 왜 그리 소홀히 대하게 되는 걸까.
참, 미안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