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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브리엘의오보에 Apr 15. 2020

사회, 문화, 관계 최적화: 동료

라이프스타일, 삶, 일상, 생활을 최적화하자는 이 글에서 이 장의 제목은 어울리지 않고 거대해 보인다. 이는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게 된다. ‘나와 관련된 인간’에 관한 이야기가 된다. 즉,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대상’에 관한 이야기다. 필자가 장의 제목으로 정하는데 망설인 이유가 이것이다. 그러나 사용하기로 결론을 내린 것은, ‘나의 삶’을 최적화하기 위해 ‘사회, 문화, 관계’를 최적화하라는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믿고 싶은 사람’, ‘믿고 있는 사람’, ‘믿었던 사람’이 있나?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쩌면 죽고 난 후에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가족부터 친지, 친구, 이웃을 만난다. 나에게 진지하든 진지하지 않던, 우리는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스마트 폰 연락처에 저장된 연락처의 개수를 보라. 언젠가 한 번 이상은 만난 사람들이다. 나의 일과 많거나 적게 관련된 사람들이다. 


때론 마음 없이 웃고 있는 자신,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데 오해 받는 자신, 때론 진심으로 웃고 있는 자신, 시간이 지나서야 진심을 이해 받은 자신이 된다. 울고, 웃고, 기쁘고, 슬프고, 분노하고, 짜증난다. 그것이 타인과의 관계 생활이다. 


필자가 생활 최적화를 시작하면서 자신을 이해하자고 제시한 이유를 다시 되뇌어 보자.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닥친 일로 이리저리 이끌려 다녔다. 주도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되는 과거의 일면도 누군가 이해해 주어서, 누군가 협력해 주어서,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어서 그렇게 살게 됐는지 모른다. 대인 관계는 능동태보다 수동태가 현저히 많은 세계다. 태어나서 가족부터 친구로, 직장 동료로, 거래처로 협력기업 담당자로 확산일로의 관계 형성을 해왔다. 친구가 된 사람도 원수가 된 사람도 있다. 두 손바닥이 만나야 박수 소리가 나듯, 친구가 되는 우정도 원수가 되는 적대도 모두 내가 관련되어 있다. 나만 변한다고 대인 관계가 좋아지지 않는다. 타인도 변해야 한다. 다만 내가 변하면 타인에게 손을 내밀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생활 최적화에 대인관계에 관한 고려는 필수 과정이다.


■ 사회 社會: 같은 무리끼리 모여 이루는 집단.

■ 문화 文化: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 이상을 실현하고자 사회 구성원에 의하여 습득, 공유, 전달되는 행동 양식이나 생활양식의 과정 및 그 과정에서 이룩하여 낸 물질적ㆍ정신적 소득을 통틀어 이르는 말. 의식주를 비롯하여 언어, 풍습, 종교, 학문, 예술, 제도 따위를 모두 포함한다.

■ 대중문화 大衆文化: 대중이 형성하는 문화. 생활수준의 향상, 교육의 보급, 매스컴의 발달 따위를 기반으로 이루어지며,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전제로 하기 때문에 문화의 상품화ㆍ획일화ㆍ저속화 경향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 관계 關係: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

*편집 전 참고: 네이버 사전


삶에서 생명 다음으로 점유율이 높은 구성요소다. 집을 나서지 않아도 사회, 문화를 이용하고 관계를 맺는다. 타인을 접하지 않는다 해도 웹 페이지, SNS의 ‘조회 수’를 늘리고 ‘좋아요’를 클릭 한다.


자기를 개발 開發하거나 계발 啓發한다 해도, 홀로 삶의 개선은 이룰 수 없다. 손수 쌀을 건강하게 재배할 수 없고, 옷 한 벌 속옷 한 벌 건강하게 지을 수 없으며, 비, 강물을 먹을 수 있게, 아니 건강하게 정수할 수 없다. 자기개발은 일과 관계가 있다. 하지만 일도 홀로 완료할 수 없다. 노트북에 연결된 인터넷을 손수 연결할 수 없고, 문서 제작 소프트웨어를 손수 만들어 사용할 수 없으며, 영업, 청구, 수금, 상품 조달, 보관을 모두 손수 할 수 없다. 눈앞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해도 홀로 살아남을 수도 없다. 당신의 행동양식, 의식주, 언어, 풍습, 학문은 스스로 깨우쳤는가?


두 번째 질문, 당신은 사회, 문화, 관계를 유지하는데 어느 정도의 자금을 투자하고 있나?


‘돈 쓰기 아깝다‘라고 느낀 적도 많을 것이다. 계산을 하면서 한숨을 푹 쉰 적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어쩔 수 없다‘라며 필요악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관계는 ‘지불’을 하면 마무리 된다. 어떤 사회는 ‘미소’로 답할 수 있다. 어떤 문화는 ‘흉내’만 내도 소속 구성원으로 인정한다. ‘껍데기만 남은 자신‘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잘 살아 왔다‘고 위안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사회, 문화, 관계‘가 최적화되도록 노력해서 나아진 생활을 하고 싶다. 이 과정에서 진짜 필요악은 ’당분간 고독할 각오‘일지도 모른다.


■ colleague = collega(라틴어): con(함께) + -lega(legere; 선택하다, 파견하다)

 = 동일한 직책이나 사명을 가진 사람을 여러 명 보내는 것. 중세 이후 주로 의사, 교수, 변호사, 국회의원 등 특정한 자격이 국가나 사회단체로부터 주어지는 경우. 

coworker = con(함께) + work(일하다)

■ ally: 동맹국, (정치적) 협력자

■ Fellow: 원래 Fee(요금, 자본금)와 Lay(놓다, 투자하다)가 합쳐진 단어였다. 공동투자자라는 의미에서 출발하여, 공동책임과 동일한 운명의 뉘앙스.

■ Comrade: 무슨 어려운 프로젝트를 같이 해냈다든가, 상사의 부당한 처사에 공동으로 항의하였다든가 하는 등의, 고난과 투쟁의 경험을 같이 했을 때 그렇게 부를 수 있겠다. 이 단어는 라틴어 Camera(방)에서 온 것으로 ‘한 방을 같이 쓰는 사람’에서 그 뜻이 유래.


Colleague라면 서로 직업적 자부심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고, Co-Worker라면 서로 협조해야 하고, Fellow-Worker라면 동고동락의 연대감을 가져야 하고, Comrade라면 옳은 것을 위해 힘을 합쳐 투쟁해야 할 것이다. 

*편집 전 참고: http://weekly1.chosun.com/site/data/html_dir/2006/06/28/2006062877014.html


동료를 갖자.


필자는 이러한 어원에도 불구하고 동료를 ‘내 등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독자는 다른 정의를 유지할 수 있다. 필자가 이렇게 정의하는 이유 중 하나는, ‘con(함께) + league(동맹, 연맹, 맹약하다)’로 동료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을 주위에 유지할수록 나의 생활은 행복에 가까워진다. 필자는 그렇게 믿는다. 물론 도움을 받기만 할 수 없다. 동료란 서로에게 등을 맡기는 대신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동료는 구하기 어렵다. 단정할 수 있다. 쉽게 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가만히 있어도 등을 맡길 만한(완전히 나만의 판단이다) 사람들이 다가오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 있다. 어떤 분야든, 쉽게 사는 것 같이 보이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라 내 욕심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그 사람이 평소 어떤, 보이지 않는 노력을 했는지 내가 모르기 때문이다. 일반론적으로 말해서, 동료는 구하기 어렵다. 이유는 나의 생활 반경이 좁기 때문일 수 있다. 동료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지금까지 북 치고 장구 치며 혼자 해 왔는데 옆에 누가 있으면 방해만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동료를 구하기도 스스로 납득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동료’로 주위를 감쌀 필요가 있다. 나에게 맞는 생활에서, 이러한 동료는 행복에 이르게 하는 요인 중 가장 중요하다.


위에서 필자가 정의한 동료를 분해해 보자. 


굳이 같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 관련 되어 있으면 대상이라 하겠다.


‘내가 사는 세계’라는 표현을 필자는 사용한다. 우리 모두가 현재 지구 위 우리나라 안에 살고 있으니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배우가 사는 세계와 회사원이 사는 세계는 다르다. 살며 접하는 관계와 문화가 다르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세계’는 실존하는 개념이다. 내가 사는 세계에서 나는 복수의 타인과 굵거나 가는 선으로 연결 되어 있다. 그림으로 그려 보면 나라는 동그라미 주위에 타인이라는 동그라미들이 가깝고 멀게 위치해 있고 이 동그라미들이 굵은 선이나 가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동료의 위치는 굳이 나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생태계를 보자. 사자와 영양은 같은 일을 하지 않는다. 사는 세계도 다르다. 그러나 이 둘은 연관되어 있다.


믿고 싶은, 믿고 있는, 믿었던 사람


자재를 공급하는 납품업체를 믿고 있나? 대화를 나누는 상대를 믿고 속마음을 보여줄 수 있나? 믿었던 사람은 왜 지금 믿고 있는 사람이 아닌가? 그 원인은 실망인가 배신인가? 자신과 연결된 타인들의 자리를 자신이 믿는 사람으로 채워나간다. 믿을 수 있는지 입증한다. 처음에는 믿을 수 있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실망이 거듭된다면 교체도 한다. 거르고 걸러 최적화한다. ‘갑질’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즉, 타인에게 안하무인의 태도를 가지라는 것이 아니다. 믿고 관계를 맺을 사람을 찾아 ‘나에게 맞는 사회’를 구성해 나가고 이런 사회 속에서 서로 문화를 공유해 나가자는 의미다. 따라서 타인에게 다가갈 때, 관계를 유지할 때, 그리고 헤어질 때 그에 맞는 매너가 있다. 그러니 동료를 구하기 전에 사회적 매너를 먼저 익힌다.


관계 맺기는 연애와 유사하다. 동료와는 서로 베푸는 관계를 맺는다. 상대에게 단방향으로 받기만 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러니 ‘갑질’이나 ‘안하무인’과는 다르다. 높은 위치에서 고르고 내가 줄 것을 던지는 일이 아니다. 서로 베푸는 관계를 형성해 나가면 흐뭇함, 포근함, 배려 등이 점점 채워져 ‘사회, 문화, 관계’의 장에서 말하는 최적화를 실현할 수 있다.


필자가 평생 ‘사회, 관계’에 대해 생각한 바가 있다. 필자가 죽은 후 내 관을 들어줄 사람 4명이면 필자는 만족스러운 ‘사회, 관계’를 영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평생 4 명의 동료를 구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위와 같은 세계관이 나온 이유다. 동료가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을 수 있다고 했다. 동료를 구하기 전까지 고독해도 된다. 외로움은 상실감이며 고독은 스스로의 선택이므로. 믿을 수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흐뭇하고 포근하고 서로 배려하는 삶을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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