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육아에 빠져 달게 절여진 1년을 돌아보다
가방에 물통 하나, 휴대용 물티슈 하나, 비상용 기저귀 하나 넣고 지퍼 찍- 닫기.
캡모자 눌러쓰고 가벼운 옷차림에 운동화는 필수, 아가야 공원으로 출발하자!
그래, 난 이런 육아를 하고 싶었어!
가벼운 배낭 메고, 내 속도에 발맞춰 걷는 세 살 아이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며 길을 나선다. 그냥 지나칠 솔방울 하나, 돌멩이 한 알 이 다시 보이는 이 시간들이야말로 내가 그렇게도 꿈꾸던 모습. 코로나블루와 육아우울에서 벗어나 이런 여유와 행복을 되찾기까지, 아이가 태어난 뒤로 꼬박 3년이 걸렸다.
아이 첫돌까지 1년은 정신이 힘들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 생명을 내 손에 책임지고 쥐어봤기 때문이었으리라. 불면 날아갈까 쥐면 깨질까 두렵고 외로워 매일을 울었더랬다. 머지않아 이 생명이 제법 제 몫을 해내기 시작하면서 막연한 두려움의 감정은 사라졌지만, 이내 두 돌까지 1년은 또 몸이 힘들었다.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주제에 자아는 생겨버린 무한체력 남자아이를 매일 혼자 감당해야 했다. 하루종일 밖에서 놀아주지 않으면 아이는 힘이 남아돌아 낮잠도 자지 않았다. 게다가 좌충우돌 얼마나 빠른지 잠깐사이 이마를 땅에 박고, 모서리에 부딪히고, 높은 곳에 올라가기 일쑤였기에 매일매일 내 모든 체력을 다 써내야 했다.
‘매 해마다 힘든 이유가 달라질 뿐 고난의 총량은 똑같잖아?! 나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슬픔을 안은채 살아가다 보니 어느새, 육아의 황금기 세돌이 찼다. 놀랍게도 태어난 지 3년이 꽉 차자 육아는 마법처럼 쉬워졌다. 마늘과 쑥을 먹고 곰이 사람이 된 것처럼, 핏덩이 짐덩이 아기가 몸 튼튼 마음 튼튼, 제법 인간의 형상을 띄게 된 것이다!
말이 통하고, 나와 쿵작이 잘 맞고, 나를 닮고, 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닮은 아기가 이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사랑스러운 입으로 내가 지난 2년의 육아 암흑기동안 빈독에 물 붓듯 혼자 부어 넣었던 사랑의 말들을 되돌려주고 있었다. 와- 이것은 사랑이요, 천국이구나.
매일 아침 ‘오늘도 아이를 <돌봐줘야 한다>, 점심을 <해줘야 한다>, 몸을 <씻겨야 한다>, 해야 한다, 해야 한다…’ 의무감과 부담감으로 해 뜨는 게 무서웠던 시간들도 다 지나갔다. 아침에 사랑스러운 아이의 목소리에 잠을 깨고, 오늘은 같이 뭘 할까 생각하고, 내가 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갈 뿐임을 느끼게 되자 육아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꿀이 되었다.
더 이상 요리가 힘들지 않아 졌다. 아이를 위한 이유식이 따로 필요 없이 똑같은 어른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으면 됐다. 청소도 쉬워졌다. 거실을 장악하던 베이비룸이며 각종 장난감들이 창고로 들어갔고, 티슈곽 하나를 다 뽑아놔 집을 초토화시키던 말썽꾸러기는 어느새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빨래도 간단해졌다. 아기옷 어른옷 할 것 없이 한데 넣어 빨기 시작하며 빨래산은 어느새 빨래 언덕정도로 부담 없이 줄어들어있었다. 아- 이거구나, 실낱같은 희망의 빛줄기.
여전히 집안일은 귀찮고, 또각또각 구두소리 내며 사회 집단에 속하지 못한 내 위치가 아쉽지만, 그럼에도 평생의 시간 중 가장 귀여울 시기의 아이와 언제든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택한 전업주부라는 직업을 자랑스럽게 만들었다. 출퇴근에 매이지 않고 날씨만 좋으면 아이와 놀러 가는 합법적 백수의 일상이라니!
사실은 애 핑계를 대고 내가 놀았다.
고맙게도 아이가 나를 놀아줬다. 내가 놀자는 대로 신나게 따라와 주는 아이가 있어서 나는 행운아였다. 아이와 나 둘이서 뿜어내는 시너지가 서로에게 유익했다.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나의 젊은 날과 내 아이의 귀여운 어린 시절. 이때를 놓치지 않고 꿀육아 단물을 쪽쪽 빨아먹으려고 나는 전업주부가 됐던 거다.
내가 기대한 전업주부/전업육아인의 가장 큰 메리트는 ‘아이와 보내는 온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내가 이를 맘껏 누릴 수 있음에 비로소 감사할 수 있었다.
어릴 적 내 모습과, 그때 내 부모님의 마음과, 지금 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시선. 이를 모두 아는 상태로 이 아이와 발맞춰 걷는 산책은 인간의 본질을 세세하게 음미할 수 있는 황홀한 일이었다. 나는 어쩌면 하나님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이 자식을 통해 인간에게 알려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구나,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작은 아이를 바라보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그 사랑도 이전까지의 입에서만 맴돌던 사랑이 아니었으니, 신의 마음에 한발 더 가까워진 진짜 사랑을 배우게 됐다. 너를 키우는 척했지만 실은 내가 크는 시간들이었다.
그래, 내가 전업주부가 돼서 알고 누리고 싶었던 건 바로 이거였다. 진짜 사랑.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진정한 필요가 채워지고 그 외의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요즘 과학의 설명을 덧붙이자면 도파민을 분비하는 회로가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가씨시절 나를 행복하게 했던 잘 된 화장, 예쁜 내 모습, 재밌는 전시 같은 것들도 물론 아직 나를 기쁘게 할 수 있지만, 이 작은 아이가 보이는 웃음과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에야말로 내 도파민은 폭발하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그 행복감에 취한 채 1년을 충분히 놀았다. 욜로가 있다면 바로 내가 욜로다-라고 생각했다. 파워 J였던 내가 내 상태를 평가하기에도 무언가에 만취된 사람처럼 너그러워졌다. 그동안 힘들었으니까, 이제 좀 여유롭게 쉬자 했다.
인생 최고의 명언이 아빠가 말해준 ‘주마가편’이었던 터라 (달리는 말에 채찍을 더 내리친다) 멈춰있고 고여있는 것이 곧 내 숨통을 조이는 것처럼 느끼곤 했던 나였지만, 지난 2년을 보상하듯이 육아의 달콤한 맛을 느끼기에 바빴다.
82년생 김지영에 나왔던 ‘애 어린이집 보내고 브런치 먹는 여자’가 됐지만 다행히 주변은 92년생 나에게 그 책처럼 눈치를 주지 않았다.
엄마로서 잘하고있다고 해줬고, 주부로서 충분하다 해줬다. 나도 그런줄알았다.
그렇게 1년을 놀다가 다시 마주한 새해, 고등학교 동창회에서-
나는 내가 창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