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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조용히 Feb 06. 2024

‘엄마’라는 직업을 너무 만만히 봤다

코로나와 산후우울증이라는 쓰나미

거울 속에는 뚱뚱한 몸으로, 신생아를 달고 있는, 무경령 무직 20대 후반 여성이
가족과 친구들과 멀리 떨어진 채 혼자 아이를 돌보고 있었고,
창문 밖은 코로나로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평생 엄마 품에서 따듯한 사랑과 관심을 마음껏 받아먹은 나였기에, 이제 그대로 내 아이에게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내 엄마처럼 내 아이 빨래를 개어 주고, 맛있는 요리를 해주고, 학교 다녀오면 집에서 환하게 반겨주고…

모든 것이 아이만 낳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나는 <엄마>라는 직업을 너무 만만히 봤다.


나는 우리 엄마랑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일단 레벨부터 달랐다. 몇십 년 내공의 달인이 되겠다고 수습생이 부푼 꿈을 꾼 것에 불과했다.

“대체 왜 우는 거야 대체 왜! 나한테 왜 그래??!!”

갓난아기를 향해 죽일듯한 눈빛을 쏘아대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내가 꿈꾸던 엄마가 아니었다.

매일매일이 나를 힘들게 하는 아기와 싸우고, 그런 내 미숙한 모습에 자책하고, 더 나은 상황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주변을 탓하는 시간들이었다.


바깥공기를 쐬지 않으면 답답해 미쳐버릴 것 같은 나에게 육아와 코로나가 함께 쓰나미처럼 덮쳐왔다.

산후조리원 티브이에서 ‘코로나19’라는 단어가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달부터는 남편들도 들어오지 못할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리라, 신경 쓰지 않았다. 산후조리원에서 세끼 차려 나오는 밥을 먹고, 따듯한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내심 ‘힘들지만 역시 난 할 수 있어’라고 자신했다.

‘코로나19’라는 저 단어가 나를 얼마나 바닥까지 끌어내릴지 모르는 채.

조리원에서는 조금만 갑갑함을 느껴도 나를 위한 십분대기조 남편이 매번 원하는 곳으로 데려가주었다. 몸은 아플지언정 리프레쉬가 가능했다. 아기를 맡기고 언제든 나갈 수 있는 상황이 임신때와 같이, 어렵지 않았다.

내 몸만 배를 갈라 피나고 가슴만 부어올라 아플지라도, 이 정도 희생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소위 말해 ‘워라밸’이라 하지 않는가?

아이를 위한 내 희생과, 나를 챙기는 시간이 충분히 균형을 이룬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산후조리원에서의 3주 ‘집행유예’ 기간이 끝났다.


이건 아니잖아
이건 사람 사는 게 아니잖아!

이제는 남편도 출근해야 했고, 엄마 아빠도 그 누구도 날 돌봐줄 수 없었다. 시간을 내서라도 도와주러 오고 싶어 했지만, 누구든 코로나 병균을 옮길까 봐 왕래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누가 날 돌봐주길 바랄 수 없이 매 순간 내가 돌봐줘야 하는 아가만 내 옆에 있었다. 아직 내 상처도 제대로 낫지 않았는데…

가뜩이나 한적한 신도시에는 말 그대로 개미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았다. 적막과 고요 가운데 아이와 나 둘 뿐이었다. 나를 두고 일하러 가는 남편이 지독한 배신자처럼 느껴졌다.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꼭 안아주고 “빨리 올게” 한 마디 후 현관문이 탕- 닫히면,

그 시간부로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답은 없다. 바꿀 수도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항복과 협상뿐.

유일하게 기댈 곳이 시어머니뿐이라, 매일 시댁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라도 같이 있고 대화하지 않으면 내가 고독함에 미쳐버릴 것 같아서.

아이가 생후 6개월쯤 됐을 때 시아버지가 우리 가족에게 상급지 아파트로 이사 가라 하셨을 때도

“안 돼요! 저 시댁 옆에 살 거예요. 혼자 애 키울 자신이 없어요 안 가요 안가!” 라며 바짓가랑이를 붙잡았으니!

그때의 나는 목 밑까지 물이 찰랑찰랑 차올라 잡고 있는 한 가닥 줄을 놓치면 그대로 바다에 빠져 죽을 것만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확실한 산후우울증이었다.


왜 내가 하던 모든 것을
할 수 없지?


엄마가 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포기해야 하는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엄마가 되지 말걸.

남편은 아이가 태어나기 전이나 후나 똑같이 일을 하고, 건강도 잃지 않았고, 멀쩡해 보이는데. 나 혼자 왜 이렇게 변하는 게 많을까?

억울해, 억울해, 억울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억울한데 억울할 자격도 없다는 사실이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모든 게 내 선택이었으니…

내가 자만했다. ‘엄마’라는 직업을 가장 만만히 여긴 건 나였다.


가장 절망적인 부분은 이거였다.

다른 직업은 포기할 수라도 있지, ’ 엄마‘는 적성에 안 맞는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

언제까지? 인생 끝날 때까지!


같은 처지라고 울고 웃던 육아동지들 중 몇은 빠르면 6개월, 보통은 1년의 육아휴직을 끝내고 일터로 돌아갔다. 멋졌다, 회사가 기다려주는 인재라니.

이내 원래의 ‘폼’을 되찾는 그들을 보며 사실은 부러움에 잠을 못 잤다. 고등학교 때부터 꿈꿔온 나의 꿈 ‘전업주부’가 꼬질꼬질하게 빛을 잃어갔다. 나의 꿈이 이렇게 나를 배신할 줄이야. 이렇게까지 나랑 안 맞을 줄이야!

‘쉽게 커리어를 포기해 버린 내가 멍청했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여기에 와서 뭘 어쩌자고!‘

지옥 같던 육아 첫 해가 지나가며 조금씩 살만해져 갔지만 내 깊은 속 마음은 더 물러갔다. 대충 섞은 핫초코처럼 아랫바닥은 더 진득하게 눌어붙어있었다.

얼굴은 웃고 있었고, 순간순간 아이와 남편과 진정으로 행복했을지언정, 속 마음은 무언가를 향한 미련과 후회와 자책으로 나를 갉아먹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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