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이의 유럽일기 Oct 27. 2024

완벽하지 않은 날



지난 주에 완벽한 날들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난 후, 이번 주에는 하루 날을 잡아 ‘노플랜 데이(No plan day)’를 보냈다. 이름처럼 아무 계획도 없이, 마음의 소리가 원하는 대로 보내기로 했다. 지금까지의 휴일은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이 날 만큼은 마음먹고 제대로 쉬기로 했다. 아니, 그 마음도 먹지 않기로, 힘을 빼기로 했다. 



가끔 지나쳐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수선집이 이 날은 예뻐 보였다 (c) noi 2024



일어나진 시간에 일어나고 씻고 싶을 때 씻고, 먹고 싶을 때 먹었다. 예전에는 쉬는 날이 되면 뭔가 특별한 휴식 시간을 보내야 할 것 같아서 생각하느라 시간도 많이 쓰고 에너지도 많이 썼다. 오늘은 그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선크림만 바르고, 화장도 생략했다. 손에 집히는 대로 주섬주섬 옷을 걸치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운동화를 신었다. 길을 걸으며 습관처럼 상점의 쇼윈도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을 확인한다. 양말을 잘못 골랐다. 공들인 코디는 아니지만 이 양말은 좀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다. 오늘은 완벽하지 않은 날이니까. 



좋아하는 카페에서 좋아하는 가방, 좋아하는 말차라떼,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독일어판과 함께 (c) noi 2024



어디로 갈까. 머릿속에 가장 처음 떠오르는 카페로 정했다. 말차 라떼가 맛있는 곳이다. 책도 챙기고, 아이패드도 챙긴다. 가방도 대충 쌌다. 생각해 보니 요즘 나는 나답지 않게 가방도 너무 꼼꼼히 쌌더랬다. 평소에 읽어야지 읽어야지 생각만 하던 독일어로 된 책도 오늘은 어쩐지 읽고 싶어졌다.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다. 녹차 라떼를 하나 받아 들고 창가 자리를 하나 차지하고 앉았다. 책을 읽다가 아이패드를 보다가 끌리는 대로 이것저것 했다. 가족들이랑 연락도 하고, 친구들이랑 연락도 하고, 그렇게 가장 좋아하는 카페 타임을 보내고 나왔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더 이상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가 미안했다. 



훌륭한 연주였다 (c) noi 2024



밖으로 나가 또 발길 닿는 대로, 아니 그냥 익숙한 대로 걷다 보니 아름다운 바이올린 연주가 들렸다. 길거리 공연 치고는 음향 퀄리티가 굉장히 좋았다. 몇몇 사람들이 동전을 기타 가방 안에 넣으며 눈인사를 했다. 주머니에 동전이 있었다면 나도 보태고 싶었는데 마침 가진 동전이 없었다. ‘꼬르륵’. 내 뱃속에도 뭐가 없나 보다. 그러고 보니 생각 없이 다니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 금방 배가 고파왔다. 혼식을 할 용기는 있지만, 유학생의 지갑은 용기가 없었다. 한국처럼 편의점이라도 많다면 잠깐 들러서 삼각김밥이라도 먹고 싶은데 나는 지금 편의점은커녕 한식당 조차 드문 독일 길거리 위에 서있다. 그럼 독일 사람들은 밖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때울 때 무엇을 먹느냐고? 이럴 때는 베이커리다. 



생각보다도 꽤 맛있었던 에그 샐러드 빵 (c) noi 2024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문을 연 베이커리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나 말고도 빵이며 샌드위치 같은 것들을 사기 위해 네댓 명의 독일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보통 버터 크로아상만 먹는 나지만, 오늘은 뭔가 다른 걸 먹고 싶은 호기심이 생겼다. 제일 친숙해 보이는 맛으로 골랐다. 가격은 2.40유로, 한국 돈으로 3,600원이다. 간단히 배 채우기 좋은 가격이다. 계란 샐러드 빵을 야무지게 베어 먹고, 책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이는 벤치 하나를 발견해서 앉았다.



혼자서 책 읽기 딱 좋았던 공원의 한 벤치 (c) noi 2024




책을 읽으려고 펼치다가 눈앞에 있는 풍경이 밟혔다. 

와-. 

너무나도 예뻤다. 노랗게 물든 나무도, 아직 여전히 푸르른 나무도, 그들을 자신의 몸에 온전히 비춰내고 있는 작은 연못도, 나뭇가지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는 햇살도 양옆에 앉아 조곤조곤 수다를 떠는 도시 이웃들도 - 이 순간의 이 분위기가 너무나 평화로웠다. 

그 순간 그냥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책 '인생 수업'에서 나중에 바다를 보고 싶어 하지 말고 지금 보라고 한 것인가 보다. 하지만 이 하늘과, 이 온도와, 이 바람, 이렇게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날이 늘 내 인생의 속도에 맞게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아니, 혹은 내가 그렇게 찾아갈 여유가 없다. 점점 더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볼 때마다 멈추게 되는 예쁜 단풍 (c) noi 2024




그래도 가끔은 이런 완벽하지 않은 날을 또 만들어야겠다.

완벽한 날만큼이나

완벽하지 않은 날도 채워갈

나의 유학 생활, 파이팅.


















이전 26화 완벽한 매일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