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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결정, 정말 맞는 걸까?

어쩌면 우리의 갈림길은 이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by 노이의 유럽일기

나의 첫 워홀은 스물두살에 떠났던 일본이었다. 도쿄에서 신칸센을 타고 40분 정도 달리면 도착하는 오다와라라는 작은 동네의 산 위에 있는 힐튼 호텔에서 일했다. 호텔에는 나 말고도 일을 하러 온 한국인이 여럿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도 있었고, 나이가 더 많은 사람도 있었는데 그중 제일 나이가 많았던 언니가 서른 가까이 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스물아홉이었던가, 서른이었던가. 나중에는 더 나이가 많은 오빠도 일을 하러 왔었다. 그들의 나이가 정확히 어땠는지는 이제 기억이 흐릿하지만, 어쨌든 저 나이에 일본 워홀을 오다니 진짜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던 기억만큼은 또렷하다. 그리고 그 기억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랬던 내가 그때의 그들처럼 나이 서른에 또 워홀을 오게 될 줄이야.



스물두살의 나는 일본이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워홀일 줄 알았다. 워홀을 다녀와서는 취업 준비라는 핑계로 일 년을 더 쉬었다. 곧바로 4학년이었는데 바로 취업을 할 자신이 없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휴학을 2년이나 한다며 반대하는 어른들이 많았다. 얼른 빨리 졸업해서 빨리 직장생활을 시작해야 한다며, 남들보다 더 뒤처지지 않게 얼른 출발선 앞에 서야 한다는 부담감이 쿵 하고 다가왔다. 소리도 들리지 않고 눈에 보이지는 않는데 내 머리 위로 제야의 종만큼 커다란 타이머가 째깍째깍 거리며 돌아가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휴학을 한 번 더 강행했다. 어차피 앞으로 평생 일해야 한다면, 지금이 내 맘대로 쉴 수 있는 마지막 일 년일 것 같아서. 지금도 그 결정에는 후회가 없다. 그래서 결국 원하던 회사에도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그때의 결정도 나름 무거운 결정이라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아무것도 이뤄놓은 게 없던 스물두살의 워홀과 취업준비 1년을 위한 휴학 결정은 오히려 쉬운 편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것들은 20대에 한 번은 해보아야 할 화려한 도전 같은 퀘스트였다. 그런데 30대를 문 턱에 둔 워홀은 달랐다. 크든 작든 내가 그동안 일궈놓은 것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그때 멈추지 않고 그대로 커리어를 계속 이어나갔다면 나는 그래도 제법 괜찮은 커리어를 쌓아나갈 수도 있었다. 아주 똑똑하지는 못하더라도 맡은 일을 성실히 했고, 운이 좋게도 주위에 능력 있는 분들을 많이 만나서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던 적도 있었다.



동시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번아웃이었다. 일이라는 것도 결국 '나'라는 사람이 두 발에 힘주고 똑바로 설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내가 쌓은 모든 경력과 인맥을 내려놓고 완전히 새로운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 아무리 일 년 만에 돌아오는 계획이었다고 하더라도 - 정말 오랜 고민이 필요했다. 결혼부터 미래에 대한 준비, 앞으로의 나의 진로까지.



나이를 먹을수록 인생의 고민들을 현명하게 대처해 나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깨달음 외에는 모든 것이 흐릿했다. 독일로 가자고 결정을 내린 후에도 한동안 마음이 너무 시끄러워서 바로 비행기를 탈 수 없었다. 이 시끄러운 마음을 한국에서 진정시키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만약 결혼을 하고 싶다면 당장 적극적으로 결혼 상대를 찾았어야 할 나이,

만약 집을 사고 싶다면 당장 적극적으로 주택청약을 넣었어야 할 나이,

만약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고 싶다면 당장 적극적으로 재취업을 했어야 할 나이.

그런데 지금, 독일로, 이것이 정말 맞는 선택일까?



하지만 결혼은 나 혼자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고, 집은 사게 되는 순간 대출금과 이자를 갚기 위해 평생 집의 노예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을 하는 건 좋아하지만 딱히 승진과 출세에 큰 욕심이 없었고, 무엇보다 그때는 너무 지쳐서 일을 더 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결혼도, 집도, 성공적인 커리어도 모두 내려놓았다.

그리고 새로운 길을 향해 마음을 굳혔다.

'결혼 대신 경험'에 투자하기로.



그런데 살다 보면 과거의 내가 어떤 마음으로 왔는지가 희미해진다. 내가 왜,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는지가 침침하게 가라앉아버린다. 내 결정이 과연 옳았던 것인지 수십번 내게 다시 묻고, 이 길이 맞는지 다시 묻고, 남들이 가는 그 길과 다른 내 길을 끊임없이 비교하며 작아진다. 그래서 몇 년 전 즈음엔가 처음의 그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서 작은 메모지에 크게 써서 벽에 붙여두었다. 잊을만 하면 또 보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어야지.





"나는 경험에 투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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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 때 다른 길을 선택했더라도 나는 결국 비슷하게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 때는 쫙 갈라져서 다시는 이어질 수 없을 것 같은 갈림길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 듯 보였지만, 막상 살아보니 사실은 그 길은 다시 만나는 길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인생은 직선이 아니라 안에 수 없이 많은 직선이 교차하며 이어져 있는 동그란 원일지도 모른다. 이 길도, 저 길도 결국은 이어져 있다. 그러니 괜찮다. 어떤 길을 선택했든 그 길을 걷는 내 마음이 중요한 것이다. 그러니 어떤 결정을 내렸든, 나 자신을 지지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나는 한국에 있었어도 잘 살았을 것이고, 다른 나라에 갔어도 잘 살았을 거다.





시끄러운 마음의소리.jpeg 어쩌면 나의 갈림길도 이렇게 이어져 있었던 건 아닐지 (c) noi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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