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 Jan 19. 2021

눈이 오면 글이 쓰고 싶어

눈덩이만큼 불어난 상상

도시에 사는 어른들에게는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은 빡빡한 시간에  틈을 주고, 날이 서 있는 도시와 이 진 세상을 둥그렇게 바라볼  있는 기회를 준다. 사회적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에서 벗어나 아이 같은 마음을 되찾는 데에도 도움을 주기도 한다.


다행인 것은, 도시인들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상상할  있는 시간이 종종 찾아온다는 사실이다. 나에게는  날이 바로 펑펑 눈이 내렸던 날이다.


대설주의보가 내렸다길래 꼼짝없이 모니터만 보고 재택근무를 하다가 창문을 열었다. 아무것도 내리지 않았다. 30분이 지나 창문을 다시 열어 봤더니, 어느새 겨울왕국이 눈 앞에 펼쳐졌다.


와 눈이다!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박수도 쳤다. 온 세상이 소복이 쌓인 눈으로 덮였다. 거리는 조용했다. 눈이 흡음재 역할을 해서 주변이 조용해진다는 과학적인 근거 대신, 다르게 의미를 부여해보고 싶었다.


천천히 걸으며 눈을 밟는 소리, 눈 치울 때 삽이 땅에 긁히는 소리, '눈 온다!'하고 소중한 사람들에게 메신저든 목소리로든 외치는 소리, 그리고 어린이가 된 것 마냥 기뻐하는 내 마음의 소리에 가까워졌다.

이 모든 소리를 더 잘 듣고 선명하게 새길 수 있도록 눈은 고요히 내린 거다.


오래간만에 오토바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층간 소음도 없고, 이 세상에 나만 혼자 남겨진 것 같았다. 진공 상태의 우주에 덩그러니 둥둥 떠있으면 이런 기분일까. 이 적막함이 평화롭게만 느껴졌다.


조용했던 가족 카톡 방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각자 머무는 곳에서 눈이 오는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 보냈다. 모처럼 친구들을 만난 아빠는 아빠의 친구들과 어깨동무를 하고 눈을 맞으며 사진을 찍었다. 하얀 게 아빠의 흰머리인지 눈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진 속 3인방은 참 해맑아 보였다. 엄마는 집 베란다에서 바라본 아파트 단지를, 동생은 늦은 퇴근길을, 나는 눈이나 밟아 볼까 싶어 눈 위를 뽀득거리며 걸었던 영상을 공유했다. 많은 사람들 역시나 SNS에 흩날리는 눈 영상이나 길에서 만난 눈사람을 연신 찍어 올렸다.

회색 도시에 내린 하얀 눈


왜 우리는 눈을 좋아하는 걸까?

우리가 어렸을 때 한 번쯤 꿈꿔본 동화 속 아름다운 세상이 떠올라서?

아니면 자주 오지 않는 선물 같은 존재니까?

비가 올 때는 나가서 어떤 '논다'는 행위를 할 수 없지만, 눈이 오면 우산이 없어도 눈싸움을 하고 썰매도 탈 수 있어서?


나는 어른이 되어 다음 날 출근길을 걱정하기보다, 지금 내리는 눈을 보며 한없이 좋아하는 어른으로 늙어가고 싶다. 물론 차를 끌고 출퇴근해본 적이 없기에 속없는 소리를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한 시간 정도 일찍 출근하면 되는 거고, 조심조심 걸어 다니면 될 일 아닌가? 하고 대수롭게 넘기는 게 좋다. 예쁜 쓰레기라는 말은 때때로 안 붙이면 좋겠다. 적어도 내리는 순간만큼은 정말 좋은 일을 하고 있잖아?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얗고 평평한 땅에 그대로 누워 쓱싹쓱싹 팔다리를 휘젓고 싶다.

네모난 건물들이 눈이 땅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지 않고 비켜선 곳이면 좋겠다. 시멘트나 콘크리트가 아닌 폭신한 풀더미나 나뭇가지 끝에 눈이 앉을 수 있길 바라고 싶다. 하늘을 보고 입을 벌려 내리는 눈을 받아먹고 싶다. 옷에 잔뜩 묻은 눈을 털어내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친 다음 벽난로 앞에 앉아 유자차를 한 잔 마시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연필을 좋아하세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