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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n 15. 2022

남아공 유학생들의 생활 무협지

죠벅의 한국인 김 사장님

오늘은 같은 대행사를 통해 케이프타운에 온 유학생들과 만나는 날이었다. 솔직히 남아공으로 어학연수를 왔을 때 아프리카라는 단어가 주는 그 특별한 임팩트 때문에 무심결에 어학이라는 단어는 떼어진 채 여행가방만 들고 온 느낌이었다.


하지만 막상 하루하루가 지나고 나니 아프리카에서도 일상이라는 것이 생긴 느낌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면 학원에서 공부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반복되는 일상에 왠지 아프리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생소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마치 한국에서 학교를 다니던 모습과 비슷해져가는 일상에 대해 실망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던 차였다. 분명 서울이 아닌 케이프타운에 있기때문에 처음 겪는 신기한 즐거움이 있긴 했지만, 더불어 따라오는 정체모를 외로움이 생겨났다. 게다가 예전엔 몰랐던 한국에서의 익숙했던 습관들이 타지에선 낯선 모습으로 삐걱거리게 느껴질 때 남겨지는 아리송한 먹먹함도 섞여 있는 듯 했다.


남아공에 오기 전에 기대했던 것들과 막상 이곳에 와보니 느끼는 현실 사이의 그 특별한 간극을 와보지 않고 어찌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아무리 친한 친구들, 가까운 가족이라도 알 수 없을 이 마음을 나보다 먼저 이 낯선 땅에 와서 직접 경험하고 그 경험을 심지어 한국어로 나눌 수 있는 남아공에서의 한국인 학생이라는 동질감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 무척 기대되는 모임이었다. 게다가 그동안은 어떻게든 찾아먹었던 현지 음식 외에 남아공에서 처음 먹게 될 한국 음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니! 마다할 이유가 없을뿐더러 그저 감사할 뿐인 한국인 유학생 모임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집 근처 그린포인트에서 만난 몇몇 일행과 함께 미니버스를 타고 타운에 있는 케이프타운 기차역으로 향했다. 처음 와보는 남아공의 기차역. 주말이라 그런지 한산하기도 했지만 크기도 우리나라 중소도시의 기차역 정도 되는 것처럼 그리 크진 않았다. 우리나라 기차역에 있는 몇몇 매점들처럼 낯익은 모습의 남아공 상점들이 신기하면서도 딱히 특별하게 시선을 끄는 것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매표소에서 클레어몬트까지의 기차표를 끊고 전광판에 나타난 플랫폼 번호와 열차시간을 확인하곤 기차를 타러 갔다. 표를 쥐고 검표원 앞에서 확인을 받으면 천천히 돌아가는 검문대를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돌려받은 표에 적힌 대로 타는 곳 2번 출구로 가니 노란 페인트 칠이 사이사이 벗겨져 있는 기차가 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케이프타운에서 요하네스버그까지처럼 장거리 구간 기차엔 좌석은 물론 침대칸도 있다고 하지만 단거리 기차는 우리나라 지하철처럼 창가에 일렬로 놓인 좌석에 앉아 서로 마주 보는 구조였다. 마주 보는 간격이 한국의 지하철보단 훨씬 넓어 차창 밖으로 아프리카스러운 풍경이라도 지나치면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까지도 살짝 창밖의 풍경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른 한국분들은 기차를 많이 타보신 건지 나에게 남아공에서는 항상 소지품을 조심해야 하지만 특히 기차에서는 더욱 신경 써야 한다고 일러줬다. 오늘 같이 이렇게 여러 명이 함께 타고 갈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만약에 혼자서 기차를 탈 경우엔 특히 사람이 별로 없는 칸은 절대로 타지 말라고 당부했다.


머릿속으론 듣고 있는데, 손은 가방을 움켜쥐고 있는데,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들이 나쁘지 않았다. 초록의 아프리카 경치에 노파심으로 꾹 잡고 있던 가방이 느슨해지고 움츠린 허리가 조금씩 펴졌다. 고개를 살짝 창문쪽으로 기대고 불어오는 바람을 조심스레 느끼며 밖을 쳐다봤다. 도심 한가운데에서는 외면하면 할수록 더 빠져들게 되는 슬픈 눈빛을 가진 걸인들이 구걸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보였는데, 기차 안에서 바라보는 창문 밖에는 그런 모습들은 훨씬 드물게 느껴졌다. 노란 기차의 창문 색이 꼭 옛날 필름 영화 영사기가 된 것처럼, 차창밖으로 보이는 동네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 맞춰 천천히 한 편의 파노라마 영화를 보여주는 듯했다.


그렇게 이제 겨우 즐겨볼까 하던 차에 영화가 끝나버렸다. 그린포인트는 테이블마운틴의 바닷가 주변이었다면 한국인 유학생 모임이 있는 클레어몬트는 테이블마운틴의 반대편에 있었다. 어찌 보면 기차를 타고 테이블마운틴 주변을 반틈 돌아본 것이었다. 일행이 없었다면 어디서 내리는지도 몰라서 나의 이 첫 기차 모험 영화가 어떤 결말로 끝났을지 알 수 없을수도 있었겠지만, 다행히 나는 일행들이 있었다. 그 분들을 따라 기차에 내리니 역 앞까지 지부장님께서 직접 차를 타고 마중을 와주셨다. 그린포인트나 씨포인트보다는 한적한 모습의 클레어몬트. 대행사와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차가 없으면 이동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한국에서처럼 핸드폰을 원 없이 쓰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20명 정도의 한국 유학생들이 함께 모일 수 있는 이런 행사는 여러모로 유익하고 감사한 시간일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만나도 마치 어제 하루 못 만난 오래된 친구를 재회하는 것처럼, 날아갈 것만 같은 밥알과 밍숭한 김치라도 2주 만에 다시 만나게 될거라는 소식에 내 군침이 벌써 반긴다. 그 모습과 맛이 몇 주 전 내가 기억하던 한국에서의 그것과 사뭇 달라져 있었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반갑다.


처음 만난 사이지만 ‘한국음식’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에 포크가 아닌 젓가락이 오가는 동안 유학생들은 모두 자연스레 서로의 근황을 털어놓는다. 짧게는 3, 4달에서 길게는 벌써 1년을 향해가는 선배 유학생들 사이에서 이제 겨우 2주를 보낸 초짜 유학생의 귀는 다른 유학생들의 아프리카 경험담을 쫓아가기 바빴다. 자기가 다니는 학원에 대한 이야기, 한국 식당은 어디가 맛있는지, 음식과 특히 소주의 가격은 얼마인지, 노래방이 있다던데 진짜인지 등등. 산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이야기들에 어디를 포인트로 잡고 들어야 하나 싶은 순간 모든 사람들을 사로잡은 주제가 나타났다. 이른바 남아공에서의 사건 사고 체험.


나는 이제 겨우 케이프타운에 2주 정도 머물렀지만 작은 사건이 하나 있긴 했었다. 어학원 수업이 시작되고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난도스라고 하는 치킨 프랜차이즈에서 주문을 하고 온 사이에 테이블 위에 뒀던 지갑이 사라져있었다. 다른 나라에선 테이블 위에 무언가를 올려두고 잠깐 자리를 비우면 당연히 없어져 있을거라는 말을 몇 번이나 들었지만 이걸 실제로 경험한 순간까지 나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했다. 텅빈 테이블을 보며 내가 정말 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감했었다.


테이블 위에 핸드폰이나 지갑, 가방 등의 소지품을 한국처럼 그대로 올려두고 주문을 하러 가거나 화장실에 가면, 그건 누가 훔쳐간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누군가에게 선물입니다, 가져가세요라고 잠재적 호의를 베풀었다는 것이 이곳에선 맥락적으로 더 어울리는 상황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물건을 두고 가도 훔쳐가지 않는 것이 신기한 일인지, 물건을 올려뒀더니 진짜로 훔쳐간 것이 신기한 일인지 처음이라 살짝 헷갈렸다. 다행히 남아공에 도착한 첫주부터 습관을 들인 것이 핸드폰도 현지에서 파는 가장 저렴한 제품으로 바꿨고, 지갑에도 하루 식사값 정도만 넣고 다녀서 잃어버린 것은 별로 없었지만 나에게는 나름 남아공에 와서 겪은 첫 사건 사고였다.


그러나 이런 에피소드는 사건의 축에도 낄 수 없는 곳이 남아공이었다. 남아공의 한국인 유학생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한 한국인 사장님 한분이 계셨다. 요하네스버그의 김 사장님. 일명 죠벅의 김 사장님.


과거 90년대에 아시아 경제를 이끌었던 4마리의 용을 상징하는 아시아 국가들이 있었다면, 21세기의 시작, 2000년대의 블루오션으로 불리는 아프리카에서도 특별히 경제발전을 이끄는 몇몇국가들이 있었다. 그중에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나라 중 하나가 바로 남아공이다. 넬슨 만델라 대통령 이후 오랜 아파르트헤이트의 흑역사를 뒤로 하고 국제적 명성을 얻은 흑과 백의 통합정치와 아프리카 국가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경제성장으로 아프리카 대륙 최초로 월드컵을 곧 열게 될 국가였다.


이런 위상에 걸맞게 남아공의 수도 요하네스버그의 겉모습은 여느 선진국의 상업지구 모습에 전혀 뒤지지 않는 최신식 고층 건물들이 우뚝 솟아있다. 아프리카의 뜨거운 태양이 빌딩 유리창에 반사되어 눈부시게 빛나는 햇살 조명이 발걸음도 우렁찬 우리의 김 사장님을 비추신다. 말끔하게 위아래로 쫙 빼입은 정장에, 어색하지 않도록 깔맞춤 해주신 센스 있는 정장 가방과 반짝이는 구두. 태양 빛 그대로 담은 금목걸이를 목에 두르고 그 모습도 찬란하게 요하네스버그 거리를 누비시는 김 사장님의 등장은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찬란한 빛이 3분이 채 지났을까. 높다란 건물 협곡 사이로 어스름한 골목 한켠에서 근방 순찰을 다니던 현지 경찰에 의해 김 사장님이 발견되었다. 하얀 런닝과 팬티만을 걸친 모습으로.

 

“죠벅이 뭐예요? 그거 진짜 있었던 이야기예요? 진짜로??”


이야기에 빠져들은 내가 사람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여기 사람들은 요하네스버그를 죠벅이라고 불러.”


“진짜 죠벅에 갔다 온 거예요? 김 사장님은 아시는 분이신 거예요? 왜 하필이면 죠벅의 김 사장님이에요? 케이프타운의 김 사장님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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