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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n 20. 2022

케이프타운 길거리에서 단어장을 읽고 걷다가

You are the sunshine of my life

유키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단지 이 한 문장뿐이지만 그 속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다. 이른 아침 학원으로 가는 길, 집 밖에서 들려오는 정겨운 목소리, “써니야~ 학원가자~”라는 말이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반대로 내가 조금이라도 먼저 나서는 날에는 바로 옆옆 집에 사는 유키네 홈스테이 집 앞에서 “유키~ 유키~ 학원 가자~”라고 부르던 말도 사라진 것을 의미했다. 한국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는 이곳이지만 내가 유키를 부를 때, 유키가 우리 집 앞에서 나를 부를 때만큼은 이곳이 남아공이 아닌 한국의 우리 집 초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등교하던 때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런 친구가 떠나고 혼자 학원을 나서는 첫날, 어젯밤부터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두었다. 이젠 정말로 공부를 열심히  거라고. 처음 케이프타운에 와서 외로웠던 찰나, 온통 외국인들 가운데 좋은 친구가 생겨서 동양인 여자아이 3명이 같이 돌아다니면 하나도 무서운  는 듯 든든해서 좋긴 했지만어쨌든 나는 케이프타운에 영어 공부를 하러 왔으니까라며 괜히 혼자서 마음을 다잡아 본다. 친구들이랑 바쁘게 돌아다닌 만큼 솔직히 그동안 따로 공부한 시간은 없었으니까 내일부터 다시 열공 시작이다! 라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렇게 일어난 아침, 나는 유키랑 걸어가던 반대로  한 번 나서보기로 했. 알고 보니 그린포인트에서 타운으로 가는 길은 크게  개가 있었다. 하나는 해변가와 가까운 씨포인트와 그린포인트를 지나 케이프타운 도심으로 이어진, 일반 대중교통들이 이용하는 가장 메인로드. 그리고  번째는 대중교통은 다니지 않지만 인적도 드물고 테이블마운틴의  높은 지대의 길을 지나가  빨리 도착할수 있으며, 무엇보다 케이프타운의 풍경을 한눈에 내려다보며 걸어  있는 하이레벨로드였다.

 

오늘부턴 평소보다 조금 더 일찍 나와서 하이레벨로드를 지나 학원까지 걸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친구도 없고 아직은 서늘한 바람이 외롭기도 했지만, 나는 당당히 단어장을 꺼내 들고 외로운 마음속에 유키 대신 영어 단어 하나하나를 담아갔다.


‘preserve. 보호하다. 보존하다. conserve. 보호하다. 막다. deserve. 뭐가 이렇게 똑같은 거야? 뭐가 다른 거야?’

 

햇살도 길도, 걸어가는 것도, 유키도 잊혀질만큼 단어장에 빠져들 때쯤, 갑자기 단어장 너머로 어두운 그림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뭐지?'


순간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단어장을 눈앞에서 살짝 내렸더니 어떤 흑인 아주머니가 내 앞에 서계신다.


“너 혹시 길에서 공부하는 거니?”


주위를 둘러보는데 거리에는 나밖에 없었다. 혹시 나에게 하는 소린건가 싶어 소심하게 되물었다.


"저요?"


생각해보니 흑인 아주머니를 이렇게 가까이에서 마주 본 것이 처음이었다. 새까만 얼굴에 커다란 눈동자와 치아가 더 새하얗게 반사되어 미소가 더 크게 보이는 아주머니, 웃는 얼굴에 침은 못 뱉는다는데 그럼에도 낯선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럼 여기 너 말고 누가 또 길에서 공부하니? 어떻게 길에서 책을 볼 수가 있어? 무슨 책을 그렇게 열심히 보니?”


나는 아주머니의 하얗고 커다란 눈망울이 신기해서 쳐다보고, 아주머니는 길가에서 책을 들고 걷는 내가 정말 신기한 눈치였다. 진심으로 궁금해하는 눈빛 때문인지 나도 몰래 아침 거리에서 처음 만난  흑인 아주머니에게 고해성사처럼 어젯밤 혼자 내세우던 결심들을 털어놨다.


제가요. 영어 공부하러 여기 왔는데요. 영어를 진짜 못해요. 학원에서도 겨우 초보자반벗어 낫구요. 그래서 영어공부 열심히 해야   같아서 학원   아침에  자라도 보려 구요.”


아마 동양인인 것부터가 신기했을 수도 있고, 그런 아이가 길에서 책을 읽는 것까지도 신기한데, 그 아이가 보는 책이 영어 단어장인 것이 아주머니를 더욱 신기하게 만든 것일까. 이 아주머니 대뜸 나에게 묻는다.


“어머, 그래? 그렇다고 이 이른 아침 시간에 걸어 다니면서 공부를 한다는 거지? 그렇게 영어공부가 하고 싶으면 내가 가르쳐줄까? 너 어디 사니?”


뜬금없는 아주머니의 질문에, “ 그린포인트에 사는데요.” 라고 바로 대답해버렸.


“어머 정말? 나도 그 동네에서 사는데. 저기 보면 저쪽 골목에서 바로 첫 번째 초록지붕 집이란다. 혹시나 영어 공부하고 싶으면 놀러 오렴. 네가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싶은걸 보니 도와주고 싶구나. 길에서 공부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우와. 이젠 진짜 남아공에 현지 친구가 생기는 건가? 영어공부를 도와주고 싶다고? 당연히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really?? wow! Thank you so much! 끝나고 갈게요. 진짜 감사합니다. 조금 있다가 뵈어요.”


어느새 나도 흑인 아주머니만큼 함박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아주머니께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하이레벨 길을 걸어가면서 생각했다.


우와 이렇게 신기한 일도 있네. 어떻게 길에서 저런 사람을 만날  있는 거지? 지금  아주머니도 똑같이 ‘ 신기한 사람  있네.’라고 생각하고 계실까? 길에서  보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우리나라 오면 뒤집어지시겠네. 학생들 시험기간만 되면 버스 타서도, 지하철에서도, 걸어갈 때도, 심지어는 뛰면서도 문제집 붙잡고 있는 사람도 봤는데. 나는 고작 그냥 단어장, 그것도 오늘 아침에 처음 펼쳐본 건데. 완전 운이 좋네. 유키가 친구를 소개해 주고  걸까? 고마워 유키.’


괜히 들뜬 마음에 아주머니랑 공부하려면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에 단어장을 더욱 붙잡고 길을 걸어가긴 했지만, 솔직히 지나치는 풍경이 너무 . 테이블마운틴 너머로 비추는 눈부신 아침햇살이  능선을 따라 펼쳐진  안의 마을들을 환히 비춰주고,  도심들의 자락 케이프타운 항구의 바다 위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케이프타운의 풍경을 더욱 운치 있게 만드는  같았다. 뜻밖의 인연을 소개해 주고  폭의 풍경을 선물해  하이레벨로드를 나는 금방이라도 사랑할  같았다. 그러나…

 

“너 미쳤니? 절대로 가지 마.”


어학원에 도착해 오늘 아침, 방금 전에 일어난 일을 친구들에게 말했더니 다들 펄쩍 뛰었다. 나는 연거푸 왜만을 물어보고 있다.


“왜 가면 안 되는데? 왜 잘못됐는데? 뭐가 이상한 건데? 왜 다들 가면 안 된다고만 하는데?”


친구들에게도 물어보고 선생님께도 물어봤다. 나는 모두가 “우와 정말? 대단한데? 신기하다!”라고 나처럼 흥분하거나, 적어도 “잘됐다라는 반응은 들을  알았는데 완전 정반대였다.

 

“동양인들 대상으로 그렇게 노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어. 그런 케이스를 본 적도 있고.”


“여기엔 동양인들이 별로 없어서 튀어 보이잖아, 그 사람들도 왜 너희가 여기까지 온 이유도 대충 알고. 영어공부하러 온 거 아니까 그걸 미끼로 다른 마음 품을 수도 있고.”


“설령 영어공부를 가르쳐 준다고 하더라도 끝나고 그거에 대한 대가를 요구할 수도 있어. 진짜 그런 사람들도 있다던데?”


누구 하나 그냥 가보라는 사람이 . 조심하라고만 한다. 좋다 말았다. 그래도 진짜로 신기한 눈치였는데. 나쁜 사람 같지 않았는데. 거기다 우리 집이랑도 정말 가까웠는데. 집도 그렇게 가까운데 거짓말  있는 건가? 진짜 가면  되는 건가? 속임수인 건가? 영어공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단어장 들고 지 않았더라 말을 걸지 않았을까?


수업시간에도 아침에 만났던 드라마틱한 만남과 더불어  드라마에 대한 혹독한 친구들의 비평까지 온통  생각뿐이었다. 학원이 끝나고 남아서 보충 공부까지 하고 혼자서 집으로 되돌아 오는 길에도, 가도 된다, 가면  된다로 거의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싸우고 있었다.


‘왜 가면 안 된다고만 하는 거지? 만약에 정말로 좋은 사람이면, 진짜로 내 모습이 안타까워 보여서 도와주고 싶은 거면? 그래도 남아공에 왔는데 학교 친구들이나 선생님 말고 진짜 남아공 사람들, 흑인 친구도 사귀고 싶은데. 딱 좋은 기회 같은데.’


어느 순간, 하루 종일 맴돌던 머릿속 생각에서 벗어나 보니 아침에 걸었던  , 하이레벨 위를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문득 아침엔 보이지 않던 길가에 주차된 자동차들이 눈에 띄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


‘뭔가 이상한데. 뭐지.’


무심코 자동차들을 보면서 지나가는데 진짜 뭔가가 이상하다.


‘어? 왜 자동차 유리창들이 깨져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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