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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뜻한 선인장 Jun 14. 2022

여행도 하고 영어도 배우고

케이프타운 어학원의 풍경

가끔은 아주 짧은 시간 이 일을 해주려고 내 삶에 아주 잠시나마 스쳐간 건가 싶은 사람들이 있다. 이제 5일 후면 스위스로 돌아가는 하우스 메이트 셀리나. 그녀가 없었다면 초록지붕을 가진 어학원을 어떻게 혼자 수업 시작 전에 찾아갈 수 있었을까. 학원과 연계해서 홈스테이를 신청한 보람이 나름 있었다.


케이프타운의 대표적인 관광지역 중 하나인 워터프론트 바로 입구쪽에 자리한 초록지붕 어학원. 서울의 남아공 어학연수 설명회에서 봤던 사진 속의 그 초록지붕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지만, 지붕과 더불어 학원을 감싸고 있는 초록의 덤불은 여전히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수업이 끝나면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이 오랜 시간 수감되었다는 로빈 아일랜드행 배를 탈 수 있는 워터프론트의 유명한 바다 경치를 배경으로 간단한 점심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워터프론트 건물 안에 있는 백화점 지하 마켓같은 곳에는 깔끔하게 포장된 조그마한 과일 도시락들을 팔았는데, 그걸 들고 바다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있으면 아기자기한 아프리카 공연을 매일 같이 볼 수 있을 것 같아 마냥 좋았다.


그런데 첫날부터 이 싸늘하고 음산한 느낌은 뭘까? 평일 아침의 워터프론트는 차분하다 못해 한적하기까지 하다. 전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다양한 아프리카 전통 공연이 뒤엉킨 곳 일거라 상상했는데... 화려한 불빛에 빛나는 관광지 모습뿐 아니라 조명이 꺼지고 화장기 전혀 없는 차분한 쌩얼 느낌의 워터프론트를 볼 수 있다는 건 현지인들만 느낄 수 있는 특권 아닌 특권 같은 것일까. 나는 케이프타운에 여행자가 아닌 학생의 신분으로 왔다는 것을 매일 아침 8시면 어김없이 학원으로 향하는 길에마주치던 처량한 워터프론트 나무 위의 새소리 덕분에 알게 되었다. 그 스산한 기운이 전조였을까. 몇 분 뒤 나는 특별히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반 편성을 위해 치른 아주 간단한 영어 테스트에서 간신히, 아주 간신히 초급반을 면했다. 맨 아래에서 하나 윗반.


무슨 배짱으로 어학원에 무턱대고 왔는지 모르겠다. 사실 나는 알파벳도 초등학교 6학년 때 겨우 뗐었다. 워낙 생각과 인지능력들이 모두 자란 뒤에 영어를 배운터라, 심지어는 내가 처음 읽을 수 있게된 영어 단어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바로 마우스. 알파벳들이 하나 둘 연결되어서 한 단어가 되었던 m, o, u, s, e 마아우스으. 한글이 아닌 알파벳이라는 문자들이 모여 소리를 만들 수 있다는 단어가 처음 내 입에서 튀어나왔을 때, 깜짝 놀람과 동시에 신기하고 재밌고 황홀했던 그 기분, 그 감동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때의 감정이 6개월 이상을 버티지 못했을뿐. 암기 중심의, 그야말로 재미는 눈곱만큼도 없던 중고등학교 시절의 영어시간 때문에 내 마음 속 영어라는 과목은 태평양 심해 깊숙이 가라앉고 대신 세계사와 세계지리가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대학 전공이 국제관계이고 또 개인적으로 지구별이 궁금한 꿈때문인지 영어는 성인이 되어서도 포기하지 않게 되는 과목이었다. 남아공에 오기 전 바짝 영어공부를 하고 들어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공장과 옷가게에서 돈을 버는 것만으로도 하루 12시간이 벅찼고, 핑계인지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영어공부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렇게 들어온 어학원에서 초급반이라도 면한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는 게 더 나았을지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그럼에도 초급반은 아닐 줄 알았는데 싶은 실망감을 감추기 어려웠다.


‘에잇. 그런데 뭐. 내 수준이 지금 그렇다는데 어쩔 것인가.’


그래도 진작 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기보다는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하는 편이 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장에 있을 때 느낀 것이었지만 6개월은 생각보다 긴 시간이니까, 남아공에서의 6개월 역시 지내고 나면 분명 긴 시간이었을 거라 생각하게 될지 모른다. 나에겐 다시 그 긴 시간이 생겼으니, 한 번 배워보자.


어학원에서의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나는 자주 워터프론트 바닷가에 앉아 물결을 구경했다. 첫 번째 물결이 치자마자 두 번째 물결이 따라왔다. 문득 두 번째 물결은 첫 번째 물결과 함께 있고 싶어 그 뒤를 바짝 쫓아오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나는 이제 겨우 어학원을 다닌 지 몇 주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누구라도 붙잡아 친구가 되겠다는 열정이 불타오르기 시작했는데, 파도의 첫 번째 물결이 금세 사라져 버리듯 어학원의 다른 친구들도 곧 있으면 떠난다고 한다.


어학원의 학생들은 대부분 짧으면 2주, 길어도 3달을 머무는 것이 보통이었고, 6개월이나 1년 이상 장기로 머무는 학생들은 한국인들 뿐이었다. 이렇게 친해지려고 하면 떠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결국엔 장기 연수생 한국인 몇 분과 어학원선생님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건가 싶었는데, 심지어는 학원도 워터프론트를 떠난다는 소식이 들렸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다른 이유들은 별로 따지지 않고 온전히 초록지붕 하나만 보고 결정한 학원이었는데, 다음 주면 내가 벌써 좋아하게 된 워터프론트를 떠나 도심에 있는 롱스트리트 근처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학원 프론트에 가서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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