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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Jul 23. 2017

사랑이었고, 사랑이고, 사랑일 것이다

CAMINO DE SANTIAGO

Logrono/Asofra

+8 Day / 2016.07.12

: 35.8km (Iphone record : 44.2km)


오늘은 로그로뇨(Logrono)에서 출발하여 첫 마을에 도착하기까지 장장 13km 구간이다. 보통은 4km에서 길어도 8km 구간마다 마을이 있다. 마을이 나오면 바르(Bar)에서 아침 요기를 하곤 하는데 13km 후에 마을이 나온다니 아침은 고사하고 밤새 얼려놓은 얼음물조차 조금씩 나누어 마셔야 할 판이다.  

걷다 보면 어제 본 수사 신부님들처럼 순례자를 위해 도네이션(Donation)만 받고 자원봉사하는 사람들이 꽤 많다. 첫 마을이 나오기 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 쉼터가 있었다.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도록 마련된 이곳은 빵과 과일, 쿠키를 도네이션(Donation)으로 구할 수 있었다. 우리도 잠시 쉬어가기로 하고, 간단히 빵과 음료로 허기를 달랬다.


한눈에 봐도 기인 같기도 하고, 도인 같기도 한 할아버지가 운영하고 있다. 쉼터의 내부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여러 차례 다녀온 듯 보이는 할아버지의 사진들이 장식되어 있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성인 야고보의 상징인 표주박이 주렁주렁 달린 지팡이를 건넨다.  사진 찍는 걸 즐기지 않는 휘를 제외하고, 베드로와 나는 할아버지와 기념 촬영을 하였다. 이때, 길에서 자주 만나던 여자가 우리의 사진을 방해하는 듯한 제스처로 장난을 치는 모습이 카메라에 고스란히 잡혔다.

쉼터 한편에는 다양한 문양의 가리비 배지가 보인다. 어제 수사 신부님들이 만든 성물 목걸이에 이어 오늘은 단돈 EUR 2를 기부하고 가리비 배지 두 개를 득하였다. 백팩과 보조 가방에 하나씩 달아놓으니 '나, 순례자요.' 하는 것 같다. 배지가 마음에 쏙 들어 기분이 좋다.

실컷 휴식을 취했으니 다시 길을 나서자 싶어 가방을 메고 쉼터를 떠나려는데, 할아버지가 방금 나무에서 딴 자두를 우리 셋에게 건넨다. 순례자를 위해 쉼터를 운영하는 것도 감사한 일인데 할아버지의 인정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감사였다.

할아버지의 낙낙한 인심과 함께 다시 길을 나서자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 하지만 오늘 스페인 날씨는 계속 흐리다. 비가 쏟아지기 전에 목적에 도착해야 하는데, 아직 갈길은 멀기만 하다.

자작나무 숲에 흐린 날씨가 운치를 더한다. 몇 해 전, 이외수 선생님께 문학 연수를 받을 때의 일이다. 사부님께서 연수생들에게 나무는 무슨 색이냐고 물은 적 있다. 우리는 나무라고 하면 흔히들 갈색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자작나무는 몸통이 흰색이라고. 우리는 늘 편견과 고정관념에 휩싸여 살고 있는데, 작가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셨다.

나는 어떠한 사물과 상황이 맞닥뜨리면 그것들과 관련된 스토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말해주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베드로와 휘에게 자작나무의 색깔에 대한 에피소드를 말해주었다.

마을 어귀의 벤치에서 바나나와 음료로 요기를 하는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한다.  따뜻한 커피 생각이 간절해서 맞은편 카페(CAFE)에 들어가 따뜻한 카페라테 한잔을 마셨다. 비가 오거나 흐린 날 창 밖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맛이란 어떤 설명이 필요 없다. 맛도 일품이지만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마을을 떠나기 전 성당에 들렀는데, 성당 앞에 음식을 만들고 있는 독특한 사람의 조각상이 보인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 보니 흔히 만나는 마을의 자그마한 성당과 다름없이 검박하다.

인자한 성모 마리아 상이 보인다. 성모 마리아 상을 마주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며칠 전에 만난 마리아(Maria)처럼 나도 성모 마리아를 롤모델로 삼고 싶을 만큼, 성모 마리아가 좋아져 경도하게 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나는 성당 한 편에는 방명록이 마련되어 있는 곳이 많다. 시간적 여유가 있을 때는 이렇게 방명록을 남기기도 한다. 방명록을 앞으로 넘겨 읽다 보면 수많은 순례자들 중 한글이 유독 눈에 띈다. 혹시 일행과 일정이 달라져 순례길을 각자 걸을 때에도, 성당의 방명록에서 그들의 자취를 찾는 묘미가 쏠쏠할 듯하다.  

방명록 위에는 지도가 걸려 있는데, 그 위로 다양한 국적의 순례자들이 자신의 이름을 징표 하였다. 베드로와 휘와 나도 우리의 이름을 세계지도 위에 당당히 표시하였다. 우리 외에도 한국인의 이름은 꽤 많이 보인다.

성당을 모두 둘러보고 다시 길을 나섰고, 한참을 걷다 또 다른 마을에 도착했다.

마침 점심때여서 우리는 마을 바르(Bar)에서 피자와 빠에야를 먹기로 했다.

잠시 음식이 나오기 전 기부로 얻은 성물 목걸이와 가리비 배지를 사진에 담아 본다.

먹음직스러운 피자와 치킨 빠에야가 나왔다. 몇 해 전, 한국에서 지인이 빠에야를 사줘서 처음으로 빠에야를 먹은 적 있다. 그땐, 빠에야의 매력을 잘 알지도 못했을뿐더러 '김치 볶음 밥이랑 뭐가 다르지?'라고 말하여 지인의 웃음을 자아냈다. 스페인에 산티아고의 길을 걸으며 현지 빠에야를 맛보고 나니, 비로소 빠에야의 진진(津津)한 매력을 알게 되었다.

김춘수의 '꽃' 이란 시를 잠시 빌리자면,

빠에야,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너는 다만 하나의 김치볶음밥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배도 든든히 채웠겠다 다시 길을 걸었다.

노란색 부엔 까미노(Buen Camino)가 유독 눈에 띄는 길 위에서, 베드로를 모델 삼아 사진을 담는다.

알비아(ALVIA) 양조장에 설치된 순례자를 위한 포토 존에서도 베드로는 계속 순례길의 모델이 된다.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나헤라(Najera)에 도착했다. 하얀 담벼락에 Perigrino라고 적혔다. Perigrino/페리 그리니/ 스페인 말로 순례자란 뜻이다. 스페인은 집집마다 꽃 가꾸는 걸 즐기고, 집 담벼락에 형형색색의 옷을 입히는 것도 곧잘 볼 수 있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에 도착했더니, 사람들이 미어터질 듯 체크 인 절차의 긴 행렬이 보였다. 대부분 순례자들이 정오에서 오후 두 시 사이에 알베르게에 도착한다. 우리는 오늘 늦장을 부려 오후 세 시가 넘어 도착하였고, 좋은 시설의 알베르게는 이미 순례자들로 가득 찬 것이다. 우리를 받아 줄 수 있는 알베르게에서 머물러야 하는데, 알베르게의 시설이 낙후해 보이는 데다 긴 줄로 체크 인하기까지 한참이나 걸릴 것 같다. 우리는 지친 몸을 좀 더 편히 쉴 수 있도록 다음 마을까지 가기로 정했다.

처음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보다 꽤 핼쑥하여진 베드로와 휘,

붉은색의 강렬한 건물 아래 둘의 기념촬영을 해주고 우린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구름을 잔뜩 머금고 있는 하늘에서 금세라도 비가 떨어질 기세다.

부디 다음 마을 도착하기 전까지 비가 내리지 않기를.

우리 앞에 또 다른 순례자도 마땅한 알베르게를 찾지 못했는지 다음 마을로 향하는 것이 보인다.

구름이 잔뜩 껴 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세 맑아졌다.

앞으로 산티아고까지 몇 578km 의 거리가 남았다고 알려주는 표목 앞에 다다랐을 때,

표목 측면으로 순례자들이 한 낙서들이 인상적이다.

개중에 한국말로 적힌,


사랑이었고

사랑이고

사랑일 것이다.


고로 과거에도 현재도 미래도 사랑을 의심할지 말지어다.

사랑 예찬론자 중의 한 명으로서 이 짧은 낙서가 마음에 여운을 남긴다.

오늘 거의 40km를 걸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고, 나헤라(Najera)의 알베르게가 순례자들로 가득 차서 한 마을 더 걸어왔는데. 바로 이곳에 파라다이스가 펼쳐졌다. 조용하고 아담한 마을, 아조프라(Azofra)에 6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설 좋은 공립 알베르게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각각 남자용/여자용 2인실을 배정받고, 샤워 후 볕 좋은 알베르게의 널찍한 마당에 빨래를 탁탁 털어 널었다.


알베르게 내에 넓은 마당에 자그마한 수영장 같은 곳이 있어서 먼저 도착한 순례자들이 수영장의 찬 물에 발을 담근 채 족욕을 하고 있다. 우리 일행이 다가가자 영국인 부부 로베타(Roberta)와 말콤(Malcom)이 환하게 웃으며 여기 정말 시원하고 좋다고 빨리 와서 발을 담그라고 한다.

수영장에 걸터앉아 무릎까지 발을 담그니 물이 얼음장처럼 차갑다. 그간 무엇보다 고생한 나의 발과 다리에게 시원한 포상휴가를 주는 것이라 여겨졌다. 마침 그늘 아래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주었다. 아, 오늘 정말이지 고생한 보람이 있다. 이렇게 좋은 알베르게에 머물게 되다니. 한참을 발과 다리의 피로를 풀어주고 있는데, 말콤(Malcom)이 일어나 어디론가 간다. 로베타(Roberta)가 말하기 자기 맥주를 다 마셔서 남편이 사러가는 것이라고.


나는 로베타(Roberta)에게 '정말 좋은 남편을 뒀네요. 나도 저런 남편이라면 결혼을 해야겠어요.'라고 농담을 했다. 그랬더니 로베타(Roberta)가 두 말 않고, 정말 좋은 남편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어도 이들 부부처럼 늙어가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이라면 결혼을 해도 좋지 않을까.


한참 물놀이를 하다 보니 저녁 시간이 다 되어간다.

오늘 우리 일행은 마트에서 장을 봐서 고기 파티를 할 예정이다.


마트라고 하기엔 작은 슈퍼에서 삼겹살을 찾았는데 우리가 찾던 삼겹살은 없었다. 대신 필렛 테(Filete)라고 하는 지방분을 제거한 얇은 살코기, 마치 스팸 같은 고기를 삼겹살 대신 사고. 샐러드용 야채와 샹그리아를 만들기 위한 와인과 과일, 탄산수를 샀다. 이번에는 샐러드에 곁들일 발사믹 식초를 사려는데, 슈퍼 주인아주머니께서 본인이 직접 만든 거라며 빈 병에 발사믹 식초를 충분한 양으로 꾹꾹 담아 주었다. 게다가 필렛 테를 구울 때 쓰라고 올리브 오일도 무료로 주시는 것이다. 비록 의사소통은 원활하진 않았지만, 우리가 손짓 발짓으로 설명을 하니 낙낙한 인심의 아주머니는 우리가 찾는 식재료를 챙겨주고, 발사믹 식초와 오일도 무료로 주었던 것. 시골 인심은 어딜 가나 똑같은 것일까. 참, 인상 좋은 아주머니의 이름도 마리아(Maria)라고 한다. 스페인엔 마리아(Maria)라는 이름이 참, 많다. 모두 성모 마리아를 닮아 이리 다정한 걸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알베르게로 돌아와 간만에 솜씨를 뽐내어 보았다. 오렌지와 레몬을 사각으로 썰고 와인과 탄산수의 비율을 입맛에 따라 적절히 배합하면, 스페인에서 여름에 대중적으로 즐겨마시는 샹그리아가 뚝딱. 다음은 상추를 베이스로 깔고 오렌지, 토마토, 키위를 양껏 올린 후 양파를 잘게 슬라이스해 마리아(Maria) 아주머니가 직접 만든 발사믹 식초를 뿌리면 샐러드도 완성. 필렛 테는 휘가 열심히 굽는 중이고, 그 옆에서 베드로는 막내 특권으로 '우와'를 연발하며, '누나, 형. 제가 뭐 도와드릴까요?' 라며 테이블 세팅 중이다.


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정성스레 필렛 테를 구운 후, 저녁 상을 차리고 보니 진수성찬이 따로 없다. 옆 테이블의 순례자들이 'Great' 이라며 우릴 부러운 듯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샹그리아는 양을 넉넉히 만들어서 다른 순례자들 테이블에 한잔씩 시음할 수 있도록 나누어 주었다. 우리도 영국인 부부 로베타(Roberta)와 말콤(Malcom) 옆 테이블에 앉아 저녁 만찬을 즐겼다. 손수 만들어 먹으니 그 어느 때보다, 양껏 그리고 맛 좋게 먹을 수 있었다.

저녁을 먹으며 로베타(Roberta)와 말콤(Malcom)과 담소를 나누었다. 말콤(Malcom)이 말하길 내일 일정 중에 산토도밍고 성당이 나오는데, 성당 내부에 실제로 닭을 키우고 있다며 꼭 들러보라고 권하였다. 저녁을 먹은 후. 나는 이 두 부부를 사람 책으로 읽었고 줄 것이 마뜩지 않아 캘리그래피로 '늘, 지금처럼 행복하세요.'라고 한글을 써서 선물로 주었다.  

오늘 하루 사랑과 감사로 충만한 하루였다.


낮에 본 산티아고 이정 표목에 적힌 글이

로베타(Roberta)와 말콤(Malcom)으로 인해 다시 한번 떠올랐다.


사랑이었고

사랑이고

사랑일 것이다.


사랑은 늘 사랑일 것이므로,

부엔 까미노(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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