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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Jul 18. 2017

시에스타로 최악의 하루를 보내다

CAMINO DE SANTIAGO

Los Arcos/Logrono

+7 Day / 2016.07.11

: 28.6km (Iphone record : 36.6km)


아침 5:15분, 오늘은 29km 여정이라 아침 일찌감치 출발했다.

오늘부터 살인적인 날씨도 한풀 꺾일 거라는 예보. 아침 기온도 다소 내려가 선선하다.

휘와 베드로가 으쌰 으쌰 열심히 걸어가는 동안, 늘 그렇듯 나는 자연의 경이로움을 사진으로 기록하며 걷는다.

내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일종의 시간 기록(time record)이다. 신이 주신 망각이라는 선물에 지금의 생생한 기억이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사진을 찍어둔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남녀 두 주인공이 키스를 했던 장면이 오버랩(overlap)되는, 소박한 게 멋스러운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그 옆으로 어김없이 나타나는 노란색 화살표. 이곳이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의 길입니다, 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마을과 점점 멀어지며 해가 떠오르는 걸 보기 위해 뒤돌아 섰을 때, 서광이 비춘다. 광활한 평원 위로 서광(曙光)이 비추자 곧 '천지 창조'가 일어날 듯한 기분이다.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함에 취한 채 계속 길을 걸었다. 그저 눈으로 목격한 황홀한 광경을 카메라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실로 자연의 위대 함이랄까 아름다움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어느새 도착한 마을의 성당. 크레덴셜에 스탬프를 찍고, 기도를 하기 위해 성당 내부로 들어갔다.

성당 내부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성수가 있다. 처음엔 성수의 의미를 잘 몰랐는데 베드로가 일러준다. " 누나, 이건 성수라는 건데. 성당에 들어와서 이 성수로 죄스러운 마음을 씻는 거예요. 이렇게 손으로 성수를 찍어서 성호경을 그으면 돼요." 이어지는 베드로의 십자 성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도 베드로를 따라 손으로 성수를 찍어 성호경을 그으며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또 하나 알아간다. 처음 길을 걸을 땐 단순한 호기심과 오랜 열망, 그리고 내 소설 속 배경을 생생하게 걸어보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순례길을 걸으면 걸을수록 가톨릭에 대한 호감도가 점점 커지고 있다. 한국에 돌아가면 세례를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찬찬히 성당의 내부를 구경하다 보니 건축물 양식이 눈에 띈다. 아일랜드에 있을 때 가이드로 잠시 활동했는데, 그때 배운 건축물 양식 중 유일하게 기억나는 게 고딕 양식이다. 이렇게 중앙에서 사람 갈비뼈 모양을 연상시키며 양쪽으로 뻗어나가는 게 특징이라고 했다. 고딕 양식의 건축물은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 오스트리아 빈의 슈테판 성당, 독일 쾰른 대성당이 대표적이다.

성당을 모두 둘러본 후 마트에 가서 베드로는 샴푸를 나는 내내 없어서 불편했던 슬리퍼를 샀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분에 마지막 목적지까지 약 2km 밖에 남지 않았다.

목적지인 로그로뇨(Logrono)에 도착하면, 큰 마을이기 때문에 드디어 핸드폰 유심 칩을 살 수 있을 터였다. 그럼 가족들이랑 친구들이랑 통화를 하고, 여행하며 이것저것 검색할 수 있도록 인터넷 데이터도 실컷 쓸 수 있겠다.

마을 도착 전에 수사신부님 둘이서 순례자들을 위해 음료수를 나누어주고, 스탬프도 찍어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었다. 순례자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나에게는 핸드메이드 성물 목걸이가 눈에 들어왔다. 도네이션(Donation)으로 이 성물 목걸이를 가질 수 있다고 한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아 달랑 성의만 표시하고 갖고 싶던 성물 목걸이를 얻게 되었다.

베드로가 "누나, 득템 하셨네요."  하고 씨익 웃는다.

신부님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는데 내 포즈는 왜 이리 씩씩한지 순례길 칠일 만에 군대에 갈 기세다.

성물은 가톨릭에서 신심(信心)의 실천에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라고 한다. 득템 한 이 소박하지만 신부님들의 마음이 들어간 성물 목걸이를 목에 메고, 산티아고의 길까지 무사히 걸어야겠다.

오늘 우리는 공립 알베르게에서 머물 예정이다. 침실과 키친이 분리되어 있고, 시설은 좋은 편이었다. 샤워와 빨래를 마치고 휘와 나는 핸드폰 유심을 사기 위해 지도를 가지고 핸드폰 샵을 찾아 나섰다.

무비스타(Movistar)라는 핸드폰 샵에 도착했는데. 17:00 - 20:30 h 까지 시에스타로 영업을 하지 않아 헛걸음을 해야 했다. 돌아오는 길에 오늘은 휘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도 슈퍼에서 라이카 모바일 (Lyca mobile) 유심 칩을 파는 것이 보였다.


핸드폰 유심을 파는 전문 샵이 아니어서 조금은 미심쩍었지만, 휘가 먼저 시험대에 오르기로 한다. 한데 아시아인으로 보이는 주인아저씨가 여권을 달란다. 우리는 무언가 사기라도 당할 듯 경계하며 왜 여권을 달라고 하는 것이지 예의 주시했다. 다행히 슈퍼 주인아저씨는 사기꾼은 아니었고, 휘는 스페인 유심칩으로 무사히 핸드폰을 개통하였다. 그제야 나도 안도하며 여권을 슈퍼 주인에게 맡기고 핸드폰을 개통하였다. 스페인에서 라이카 모바일 유심칩을 슈퍼에서 파는 경우가 있는데, 혹시라도 여권을 달라고 해도 너무 놀라지 마시길 바란다.

우여곡절 끝에 핸드폰을 개통하고 알베르게로 돌아온 우리는 베드로와 나가서 저녁은 먹기로 했다. 사실 오늘 아침 일찍 출발해서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으나, 시간이 애매하게 시에스타에 탁 걸리는 바람에 핸드폰 유심 칩도 겨우 살 수 있었는데, 라면서.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 우리 셋에게 뭔가 불길한 기운이 감지된다.

 

오늘은 먹을 복이 없었던 건지 아침도 별로였고, 점심은 못 먹었고 저녁을 맛있게 먹을 요량으로 나왔는데. 들어가는 레스토랑마다 지금은 장사를 안 한다고 하거나, 남은 음식이 핑거푸드 정도여서 다시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시에스타의 해악을 톡톡히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 샾은 오후 1-5시까지. 레스토랑은 오후 5-7시 혹은 8시까지 문을 닫았다. 우리 일행은 시에스타 때문에 이 가게 저 가게 한 시간 돌다가 결국 기름기 많은 햄버거와 치킨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왠지 울고 싶은 마음이다.


게다가 며칠 전 트리니다드 데 아레 (Trinidad de Arre) 부터 우연히 같은 숙소에 머무는 스페니시 여자 둘이 있는데,  늦은 밤 알베르게에 도착해 알베르게가 떠나갈 듯 시끄럽게 밥을 해 먹고 웃고 떠들다가 잠자리에 들 때는 부스럭거리며 주변에 피해를 주는 것이었다. 오늘 우리가 머무는 알베르게에 그 친구들이 들어서자마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사람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내가. 길 위에서 그토록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것 때문에 또 이 길을 걷는다고 한 내가. 사람을 싫어하면 안 되는데. 오늘 하루 종일 부실하게 먹어서 그런지 많이 예민해졌다. 그래도 핸드폰 유심칩 사서 친구랑 페이스 톡을 할 수 이었던 것으로 위안을 삼으며,


오늘, 하루 정말 최악이었다만

부엔 까미노(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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