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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Jul 17. 2017

성모 마리아가 롤모델인 마리아의 행복은?

CAMINO DE SANTIAGO

Estella/Los Arcos

+6 Day / 2016.07.10

: 21.4km (Iphone record : 24.5km)



아침 여섯 시. 길을 나서며 빈 물병을 챙겼다. 오늘 IRACHE(이라체) 수도원을 지나갈 예정인데, 수도원에 와인이 나오는 수전이 있다고 하여 와인을 담을 요량이었다. 한데 마을이 너무 커서 마을을 벗어나는데만 대략 사십여분이 걸렸다. 아침인데도 불구하고 더운 열기가 후끈 달아올라 오늘도 어김없이 폭염이 예상된다.

드디어 IRACHE(이라체) 수도원에 도착했다.  BODEGAS IRACHE, BODEGA는 스페인어로 술을 보관하는 저장고란 의미다. 1891년 만들어진 BODEGAS IRACHE는 IRACHE라는 와인 브랜드사가 운영하는 곳으로 본래 IRACHE(이라체) 수도원에 머물거나 지나가는 순례자를 위해 와인 한 모금씩 마실 수 있도록 만든 것에서 유래했다. 순례자들이 산티아고까지 무사히 도착하길 기원하는 의미로 "순례자들이여! 산티아고까지 힘과 생명력을 지닌 채 건강하게 도착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와인 한 모금 들이키고, 행복을 축배 하라."라는 의미의 안내판도 보인다.

수전을 틀면 우측은 물이 좌측은 와인이 흐른다.

순례자들은 모두 이 곳에서 와인을 시음할 수 있고, 물병에 담아 가기도 한다.

내 순서를 기다리며 신의 물방울이 콸콸 흐를 것을 상상했지만, 졸졸졸 흐른다. 음, 그럼 제가 한번 마셔보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시음을 한다. 헛! 드라이하면서 산도가 너무 강해서 씁쓸하기 그지없다.

와인을 시음하고 걷는데 갈림길이 나왔다. 같은 목적지인데 17km의 평지와 19km의 산 길 중 택해야 했다. 아마 거리가 짧은 구간은 좀 더 가파르거나 험하지 않을까 예상된다. 잠시 순례길도 인생도 늘 선택의 연속이란 생각이 든다. 우린 잠시 고민하다가 날이 더 더워지기 전에 오늘의 목적지, Los Acros(로스 아끄로스)에 도착하기 위해 17km 산길을 선택했는데, 운이 좋게도 대체로 평탄하여 갈만했다.  

순례길에 오른 느리디 느린 달팽이를 보면 이제 자연스레 '올라!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를 하게 된다.  

출발 후, 첫 마을 Luquin에서 아침으로 보카 디오를 먹었는데 시장이 반찬이라 했던가. 아침을 거른 채 고되게 걷다가 먹어서 맛있기도 하겠지만, 스페인의 보카 디오는 빵 반죽에 꿀을 넣는 것인지 정말 별미다. 한국에서 보카 디오 장사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첫 마을 이후로는 대체로 평지였는데 기온이 37도까지 오르고, 그늘이 전혀 없는 들판 길이 쭈욱 이어졌다. 중간에 트럭 바르(Bar)에서 스프라이트(얼음 잔도 주지 않는) 한 잔 마신 것 외에는 쉬지 않고 계속 걸었더니 오늘은 20km만 걸을 예정임에도 불구하고 꽤 힘들었다.

휘는 힘이 들면 대화 따위는 하지 않고 잰걸음으로 혼자 앞서 나간다.

반면 베드로와 나는 수다를 떠는 것으로 고됨을 달래거나 사진을 찍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하늘은 말도 안 되도록 파랗고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엔 하얀 포물선이 선연하게 남았다. 순례길에 몸이 점점 적응이 되자 사유(思惟)인지 상념(想念)이 많아진다. 되돌릴 수 없는 과거도. 앞으로 한국에 돌아가면 어떤 걸 하며 살아갈지에 대한 미래도. 나와 관계 맺고 혹은 맺었던 사람들의 생각도 많이 하게 된다. 어쩐지 나의 마음에도 어떤 사람들은 저리 흰 포물선만 남긴 채 사라진 것 같아 씁쓸한 기분이 감돈다.

상념이 머릿속을 한바탕 휩쓸어도, 길이 있기에 나는 계속 걸어 나아가야 한다.

드디어 Los Arcos(로스 아르꼬스) 도착하자 귀여운 아기 염소가 우릴 맞아준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마자 짐부터 풀고 샤워와 빨래를 마쳤다.

.

며칠 전 페르돈의 언덕에서 보았던 철조각상 사진이 보인다.

순례길 기념품들로 아기자기 장식된 알베르게 내부에서 눈을 돌리자 다른 방에서 주섬주섬 짐을 푸는 할아버지가 보인다. 저 연세에 저 할아버지는 무슨 연유로 순례길을 걷는 것일까.

모든 할 일을 마친 우리는 성당 바로 앞에 있는 바르(Bar)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노천 테이블에는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있고. 우리는 까르보나라와 샹그리아를 주문했다. 샹그리아는 와인과 과일을 사서 내가 만들어 먹는 게 훨씬 맛있고 가격도 저렴할 것 같아 아쉬운 맛이다. 하지만 까르보나라는 맛있었다.

오늘 저녁에는 운이 좋게도 성당에서 저녁 미사를 드릴 수 있다.

점심을 든든히 먹은 우리는 미사를 드리는 저녁 7시까지 시에스타를 즐기기로 했다.

한 숨 곤하게 자다가 미사를 드리러 어슬렁어슬렁 나와보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마을 어귀에 꽃비가 내렸나 보다.

노란색 가리비와 화살표 방향으로 이렇게 골목을 돌면, 웅장한 성당이 나온다.

성당 내부는 굉장히 화려했고 제단의 중앙에는 성모 마리아가 모셔져 있다.

한편에는 파이프 오르간도 보이고, 웅장함과 화려한 성당 안에서 미사가 시작되었다.


미사 내용도 너무 좋았지만, 미사가 끝날 즈음 세계 각국의 순례자들을 위해 신부님이 순례자의 기도를 해주었다. 한국말로 된 순례자의 기도문도 나누어 주었는데, 신부님이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신다고 생각하니 왠지 마음에 평안이 찾아든다.


미사를 마칠 때 즈음 신부님께서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를 나누어주는 시간이 있다. 나는 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때마다 멀뚱멀뚱 신자들의 행렬을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미사가 모두 끝나자 베드로의 부탁으로 신부님께서 내게 직접, 산티아고의 길에 잘 도착할 수 있도록 기도를 해주었다.  

베드로는 미사를 모두 드린 후 신부님에게 다가가 함께 사진을 찍었고, 휘와 나는 신자는 아니지만 신부님의 영적인 기운을 좀 받으라는 베드로의 조언에 따라 신부님과 함께 사진을 한 장씩 찍었다. 미사 중간중간 찬찬히 설명해주는 베드로 덕분에 가톨릭과 성당에 더욱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미사를 드린 후, 2층 성가대 자리에 올라가 성당의 내부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때 내게 어디서 왔느냐고 먼저 말을 건네는 중년 부인. 나는 반가워서 '한국(South Korea)'이라고 하며 그녀에게 이름을 물었다. 그녀는 성당 중앙에 있는 성모 마리아를 가리키며, 자신의 롤모델(role model)이 성모 마리아라며 자신의 이름을 '마리아'라고 했다.


직업이 의사인 그녀는 아들과 남편과 함께 사이클링(cycling)으로 순례길에 올랐다고 한다. 안경을 써 이지적인 느낌의 환한 미소가 포근한 마리아를 잠시 사람책으로 읽기로 했다. 그녀의 롤모델(role model)인 성모 마리아를 배경으로 마리아에게 좀 우스운 질문일 수 있지만 '행복하냐'라고 물었다.


그녀는 '매우 행복해(very happy)!'라고 답했다. 그녀는 가족들과 이곳에서 휴가로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고, 가톨릭교도로서 성당에 예수 그리스도의 성모 마리아와 함께 있으며 종교적 영감을 얻는 것이 그녀를 행복하게 한다고 했다.

그래. 순례길을 걸으면서 가장 먼저 던졌던 원초적인 질문. '왜 이 길을 걷는가?'에 앞서 나는 길을 걸으며 만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행복한가요?' 하고. 행복은 특별한 게 아니다. 지금, 내가 순례길을 힘겹게 걸으면서도 가슴이 벅차고 매일 살아있는 게 느껴져 행복한 것처럼. 사람들도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하겠지. 저마다의 이유로 이 길을 걷는 것처럼.


짧았지만 반가웠던 마리아와의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 일행은 저녁을 먹으러 다시 노천 바르(Bar)에 앉았다.


우리 건너편 테이블에는 신부님이 신부복이 아닌 평상복을 입고 사람들과 어울려 저녁을 먹고 있었다. 신부님도 한 명의 평범한 사람과 같다는 생각에 왠지 더욱 친근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치킨 너겟과 오징어 튀김과 맥주 한 잔씩 나누었다. 저녁을 다 먹고 나니 베드로가 아이스크림을 사주어서 후식까지 든든하게 먹었다. 막내임에도 불구하고 늘 예의 바르고 센스 있게 누나 형 챙기는 베드로 너는 신이 우리에게 보내준 천사인 거니.

알베르게에 돌아오니 기타를 집어 든 베드로가 이루마의 kiss the rain을 치기 시작했다. 다소 어수선했지만 며칠 고생한 후에 이렇게 감사함이 가득 찬 Los Acros(로스 아끄로스)의 밤이 저물어간다. 오늘은 감사할 일이 참으로 많다. 고되지만 이 맛에 순례길을 걷는 것 같다. 미사를 드리고 선선한 저녁 바람에 휘와 베드로와 맥주 한 잔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행복은 별 게 아니란, 생각이 든다. 이 순간이 참, 행복하구나 싶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지만, 내가 노력하고 감사하며 찾지 않으면 결코 가까이 있지도 않는 것이다.

결코 행복을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내가 만나는 사람책에게 한 번씩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럼, 오늘은 이만.

부엔 까미노(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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