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소멸되지 않는다.
긴 슬픔의 장막이 걷히자 또 다른 슬픔의 장막이 쳐진다. 침울한 고통의 시간이 겨우 지나고, 이젠 웃을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싶은 날에도 삶은 여전히 불안과 고통을 나를 선회한다.
그 지난한 반복의 과정을 수차례 경험하고 인지하고 있지만, 지난 몇 주간 또다시 섬약한 마음은 불안과 고통의 강박에 시달렸다. 누구나 불안하지 않고 고통 없는 사람은 없을 텐데. 당장 내 앞에 닥친 고통이 지구의 모든 중력이 나를 짓누르듯 무겁게 다가왔던 게 사실이다.
더블린엔 또 비가 내리고 나는 문득 선천성과 후천성 슬픔에 대해 떠올리게 되었다.
감정에도 주류가 있다면 내 감정의 주류는 선청성 슬픔이라 칭하고 싶다.
예를 들어 선천성 슬픔을 타고난 사람이 후천성 슬픔으로 깊은 절망에 빠진 사람을 만났다. 선천성 슬픔을 타고난 사람은 애초에 세상과 사람에 대한 어떤 기대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슬픔을 슬픔이라 부르지 않을뿐더라 예삿일 정도로 여긴다. 슬픔을 감내하는 시간도 담담히 받아넘긴다.
반면 후천성 슬픔을 가진 사람은 전에 없던 슬픔으로 인해 절규하고 절망한다. 삶의 목적이라도 잃어버린듯 상실감에 빠져 슬픔이 지나가는 시간을 감내할 인내심은커녕 초단위까지 원망스럽다여긴다.
선천성 슬픔을 타고난 사람이 낙천적일 수 있는 것과 후천성 슬픔을 지닌 사람이 더욱 비관적일 수 있는 까닭이다.
전자는 세상에 대한 기대를 낮추고 주어진 자신의 삶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살고자 함이요. 후자는 여태껏 주어졌던 자신의 삶의 가장 큰 기쁨을 빼앗아 간 운명에 대적하며 원망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난 선천성 슬픔을 타고난 사람이라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