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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드작 Mulgogi Sep 02. 2017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의 문제

CAMINO DE SANTIAGO

Villafranca Montes de Oca/Burgos

+11 Day / 2016.07.15

: 40.0km이나 Ages~Burgos 까지 23.7km Bus 타고 이동(Iphone record : 26.2km)



밤 사이 베드 버그에 대한 불안으로 선잠을 자고 일어났다. 일행들을 먼저 보내고 하루 이틀 정도 이 마을에 더 머물면서 베드 버그를 박멸하고 지친 몸을 쉴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도 잠시, 덜 마른 등산화를 구겨 신으며 급하게 배낭을 꾸렸다. 이곳에 혼자 머물 용기는 아직 나지 않았고, 오늘이면 큰 도시인 부르고스(Burgos)에 도착할 예정이므로 큰 도시에 가면 병원에 갈 수 있을 터였다. 출발 예정시간보다 15분가량 늦게 도착한 나는 일행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왠지 모르게 등산화가 덜 말랐다는 둥 몸이 간지럽다는 둥 힘들다는 불평만 늘어놓는다. 베드 버그에 물린 게 무슨 벼슬을 단 것도 아닌데. 혼자 이런 상황에 처한 것에 대한 심술이 일어 그만 미안한 마음마저 면죄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어두운 새벽. 길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촌과 지인들에게서 안부 카톡이 쏟아졌다. 7월 14일, 어제는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분노한 시민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해 바스티유의 날이라고 불리기도 하는 프랑스 최대 국경일. 그런 어제 프랑스 남부 니스에서 테러가 발생했다. 니스 해변에서 휴양을 즐기던 관광객을 대상으로 이슬람 극단주의자 남자가 트럭을 타고 돌진하며 총격까지 가한 사건이었다. 작년 연말 이슬람 국가(IS)의 프랑스 파리 동시다발적 테러사건도 있었던 터라, 지인들은 혹여나 내가 프랑스 여행 중은 아닌지 걱정되었던 것이다. 삶의 한편에서 무차별한 테러가 벌어진 아침, 나는 스페인의 순례길에 있다고 안부를 전했다. 멀리서도 나를 염려해주는 사람들이 있어 길과 삶은 걸어갈만하다.

오늘은 첫 번째 마을까지 12.6km를 걸어야 하는 마의 구간이 있다. 그걸 알고 어제. 베드로와 휘가 오늘 아침 대용의 소라빵과 음료수를 내 몫까지 준비해주었다. 우리는 걷다가 산 한 중간에 쉼터로 마련된 벤치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 이곳에서 도네이션을 받고 순례자들에게 음료수를 나누어준 흔적이 엿보였다. 오늘따라 바람이 황량하게 불어왔고, 나와 일행은 별 말없이 EUR1 짜리 빵으로 배를 채웠다. 산티아고 순례 십 일일 째 우린 모두 지친 표정이 역력하다.

다시 묵묵히 걸어 두 번째 마을 아게스(Ages)에 도착했다. 커피나 음식을 사야만 화장실을 이용하도록 허락하는 바르(Bar)였다. 스페인 시골에서 볼 수 없는 좀처럼 야박한 인심에 휘와 베드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고 화장실 이용도 하지 않는다. 나는 잠시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화장실을 이용한 후 바르(Bar) 주인아저씨에게 부르고 스로 가는 버스 시간을 확인했다. 베드 버그 증상이 점점 악화되어 버스를 타고 오늘 목적지인 부르고스(Burgos)까지 JUMP 하기로 결심했다.


일행들은 계획대로 부르고스(Burgos)까지 걸어오기로 했고, 나는 먼저 도착하여 숙소에서 다시 세탁을 하면서 베드 버그를 박멸하고, 부르고스의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을 심산이다. 잠시 후 버스가 있다고 하여 버스 시간표를 받아 들고 아저씨가 일러준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면서 나는 일행들과 헤어졌다.


순례길의 모든 구간을 걸어서 완주하면 좋겠지만, 시간이나 몸 컨디션이 여의치 않을 때는 중간중간 버스를 타는 걸 추천한다. 간혹 오직 걸어서 순례를 하는 것만이 가치 있고, 사이클이나 버스를 이용하여 순례하는 사람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는 자신의 여건에 맞게 유동적으로 움직일 것을 권하고 싶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100m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과 닮았고 어떤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가든 개개인의 인생에 스스로 선택한 방향과 속도가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속도가 빠르다고 하여 그를 따라 무리해서 가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을까. 늘, 생각하는 거지만 인생은 속도가 아닌 방향의 문제이다. 무엇보다 마지막 목적지까지 몸 건강히 완주하는 것에 의의가 있는 게 아닐까.

버스를 타고 30분가량 달렸을까.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 부르고스(Brgos)에 도착하였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베드 버그 물린 자국이 너무 가려워서 진찰을 받기 위해 근처 병원으로 향했다. 한데 진료비가 EUR73라고 하여 놀란 마음에 입이 떡 벌어졌다. 순례자에게는 너무 비싼 병원 진료비에 발걸음을 돌려 약국엘 갔다. 약사에게 베드 버그 물린 자국을 보여주었더니 연고를 주면서 샤워하고 바르라고 한다. 가격은 EUR 11.6로 병원비보다 훨씬 저렴했다.


일행들을 위해 먼저 도착한 내가 숙소를 두어 곳 정도 비교하고 가장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공립 알베르게에 묵기로 결정했다. 알베르게 호스피테랄로들이 모두 친절하고, 시설도 현대식으로 깨끗하여 마음에 들었다. 우선 샤워를 하고 약국에서 산 연고를 베드 버그 물린 자국에 꼼꼼히 펴 발랐다. 후엔 어제에 이어 모든 옷과 가방까지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기를 돌린 후 햇볕 아래 잘 널어두었다.  

그리곤 숙소를 어슬렁거리다가 생장피드포르 (Saint-Jean-Pied-de-Port)에서 순례자 사무실 찾는 걸 도와준 F를 다시 만났다. 그렇잖아도 산티아고 첫날 밤 신세를 지고 다시 만나지 못해 궁금했던 찰나였는데. 얼마나 반갑던지. 비록 두 번째 만나는 것이지만 같은 한국인이라 그런지 굉장히 친숙했다. F는 생장에서 다음 날 아침 6시에 출발했고, 숙소 역시 론세스바야스가 아닌 다음 마을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어쩐지 그 이후로 다시 못 만났구나 싶었다. F는 여러 명의 일행이 있었는데 배가 고팠던 나는 F의 일행 중 한 명과 함께 점심으로 햄버거를 먹으며 각자의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게 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점심을 먹고 어제 버린 침낭을 사러 아웃도어 매장을 찾아 나섰다. 마침 스페니시 아주머니가 아주 친절하게 아웃도어 매장 두어 개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한데 또 피에스타 시간이라 매장 위치만 확인해두고 다시 숙소로 돌아가기로 한다. 스페니시들은 더운 날씨 탓에 낮잠과 휴식 시간으로 피에스타를 가지는데, 어떤 이들은 그들의 국민성이 게으르다고 타박할지 모른다. 나 역시 처음엔 상점이 느지막이 문을 열고 몇 시간 장사하지 않곤 다시 피에스타를 가지는 것에 적응이 안되었다. 하지만 피에스타 시간이 지나면 더욱 활기찬 거리에 상점과 레스토랑이 바삐 움직이는 걸 보며 밤늦게까지 활기가 넘치는 국민성을 나는 점차 사랑하게 되었다. 스페니시들이 열정적이고 활동적인 것엔 잘 쉬었기 때문에 더 생기 있게 일하고. 또 놀 땐 확실히 놀기 때문이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다리 밑에서 악기를 연주하는 뮤지션 아저씨가 눈에 들어왔다. 그를 뒤로 하고 숙소로 가는 길 광장에 아름다운 악기 선율이 울려 퍼졌다. 이번엔 LUZ Y VIDA 1948이라는 서점 안 조명에 이끌려 들어가 보기로 했다. 서점 내부가 잔잔한 조명에 비추고 있었고 오랜만에 맡아보는 책 냄새에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 시골 어딘가가 아닌 큰 도시에 있구나 안도하게 된다. 속세를 벗어나 자연과 함께 있는 것도 좋지만, 도시는 병원이나 아웃도어 매장과 같이 내가 필요로 할 때 여러 편의 시설을 바로 접할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겠다. 부르고스(Burgos) 이곳저곳을 둘러보니 그제야 풍경이 하나 둘 눈에 들어온다. 며칠간 베드 버그로 지친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은 듯했다.

실컷 마을을 구경을 하고 숙소로 돌아와 일행들에게 연락을 했다. 일행들은 멀리 부르고스(Burgos)가 보이긴 하는데 오후 다섯 시나 되어야 도착할 것 같다고 하였고, 나는 오늘 머무를 알베르게가 깨끗하고 좋다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벽에 세워둔 스틱 두 개 중 하나가 사라졌다. 코스 중에 산세가 험할 때는 스틱이 있고 없는 차이가 엄청 큰데, 누가 내 분신과도 같은 스틱을 훔쳐간 것이다. 숙소 1층부터 3층까지 돌아다니며 잃어버린 스틱을 찾아보았지만, 비슷한 브랜드의 스틱이 하나 둘도 아니고 스틱에 이름을 새겨놓은 것도 아니어서 결국 찾지 못했다.


잠시 후 F일행이 아웃도어 매장에 간다고 하여 따라나섰다. 어제 버린 침낭은 아일랜드에 있을 때 알게 된 동생이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간다고 하여 무료 나눔 해준 것이었는데, 베드 버그가 번식했을 것 같아 버릴 수밖에 없었다. 순례길에서 침낭은 이불 대용으로 필수 아이템이기 때문에 거금을 들여서라도 다시 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마침 매장의 친절한 스페니시 직원 덕분에 가볍고 따뜻한 초경량 침낭을 할인된 가격 EUR53.9 에 구매하였다. F 일행들도 순례에 알맞은 스포츠 용품들을 하나 둘 사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휘와 베드로가 숙소에 도착했다. 알베르게는 도착하는 순서대로 방과 침대를 배정받기 때문에 일찍 도착한 나는 좀 더 좋은 곳을 배정받을 수 있었는데, 오후 5시가 돼서야 도착한 휘와 베드로는 사람이 많은 방을 배정받았다. 휘와 베드로가 샤워와 빨래를 마친 후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거리로 나섰다.


마침 국가별로 각자의 전통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퍼레이드 행렬이 한창이다. 스페인에는 이런 작고 큰 축제들이 사흘이 멀다 하고 있는데, 화려한 의상과 춤에 지나가던 행인들이 일제히 멈춰서 구경을 하였고 나도 이들 무리 속에서 신기한 듯 축제를 감상하였다.

축제를 다 감상하고도 아직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 저녁은 알베르게 바로 앞에 있는, 사람들이 꽤 많이 모여 있고 음식이 맛있어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먹었다. 사람들이 모여 있던 만큼 음식 맛도 꽤 괜찮은 집이었다. 저녁 만찬 후 대성당을 둘러보았다.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이라고 하는 부르고스(Burgos)의 대성당. 사실 나는 스페인의 가기 전까지 가우디에 대해서 1도 모르는 사람이었는데. 스페인에서 처음 접하게 된 가우디의 작품이 부르고스 대성당이다. 사람의 뼈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건축 양식. 아마, 이때부터 가우디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가우디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이야기하기로 한다.   

성당 구경 후 숙소로 돌아와 바아삭 마른빨래를 걷어내고 내일을 준비한다. 순례자들이 하나 둘 잠들기 시작하는 밤 아홉 시 열 시경. 베드로가 와서 '누나 잘 자요.' 하면서 포스트 카드를 한 장 건넨다.

나와 휘와 베드로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를 때 혼자 걸을 것을 예상하고 왔지만. 어떤 인연이었는지 우리 셋이 함께 걷게 되면서 많은 의지가 되었고, 서로 간의 관계도 난로와 같이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로 잘 유지하며 십일이나 걸어왔다. 하지만 우리 각자 처음 순례길을 시작할 때의 목적에 맞게끔 언젠가 혼자서 걷는 날도 오겠지 했는데, 그게 성큼 다가온 것이다. 여하튼 그동안 누나 형 챙기느라 고생이 많았던 마음으로 손글씨로 차분히 써 내려간 베드로가 건넨 카드를 받으니 가슴이 뭉클하였다.


따로 걷게 되더라도 길 위에 있다면 다시 만나게 될 거라 믿으며,

인생은 언제나 속도가 아닌 방향의 문제라는 걸 기억하며

오늘도 부엔 카미노(Buen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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