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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 둘러보기

by 황경진

어렸을 적 기억에 남는 선물 중 하나는 부모님의 친구뷴들이 종종 사 오시곤 했던 종합 과자 선물세트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열면 과자가 끝도 없이 나왔다. 스낵, 쿠키, 초콜릿, 사탕, 껌까지. 손을 넣으면 언제고 새 과자를 쥐여 주는 마법 상자를 선물 받은 기분이었다.


산타페 시내를 둘러볼 때도 비슷한 두근거림이 있었다. 어제도 오고 그제도 왔지만 오늘 오면 또 새로운 볼거리를 내어 주는 종합 볼거리 선물세트였다.


산타페를 잠시 스쳐 가는 사람들은 주로 플라자 주변을 구경하고 갔다. 시내의 주요 볼거리와 음식점, 기념품 가게가 도보 가능한 거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기 때문이다. 이곳이 산타페의 전부라 말할 순 없지만 이곳만 둘러보아도 산타페를 보았다고 말하기에는 충분하다.


아담한 산타페의 시내


- 산타페 플라자 (Santa Fe Plaza)


플라자는 스페인어로 광장을 의미한다. 400년 전 도시를 처음 설계할 때 가장 먼저 그려 넣은 것이 플라자였다고 한다. 그때 만들어진 광장은 현재까지도 "산타페의 심장"이라 불리며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플라자는 밖에 나가면 꼭 한 번은 지나가게 되고, 갈 데가 없을 때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하는 곳이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방인에게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곳도 플라자였다. 지내다 보니 플라자는 내 일상 속에도 깊숙이 녹아들어 있었다.


녹음이 짙은 여름의 플라자에는 항상 무슨 일이 벌어졌다. 이른 아침에는 가로등 높이 매달린 화분에 기다란 호스로 물을 주는 정원사 아저씨를 만났고, 평일에는 버스킹하는 뮤지션을 만날 수 있었다. 주말에는 각종 플리 마켓이 열렸다.


매주 금요일 저녁에는 야외 음악회가 열렸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하면 반딧불 같은 조명에 불이 켜지고 음악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하나둘 무대 앞으로 나와 춤을 추었고, 사람들 틈에 섞여 둠칫 둠칫 리듬을 타고 있으면 어느샌가 퇴근하고 온 남편이 옆으로 다가와 내 이름을 불렀다. 반짝반짝 예쁜 시간이었다.


-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 (Georgia O'Keeffe Museum)


플라자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조지아 오키프 미술관이 있었다. 오키프의 초기 작품부터 드로잉까지 꽤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어서 재밌게 둘러볼 수 있었다. 입장료가 있어서 미술관은 두 번밖에 가지 않았지만 기념품 가게는 자주 들렀다. 주로 조지아 오키프 그림이 그려진 엽서를 산 뒤 근처 까페에서 엽서를 썼다. 산타페에 있는 동안 여덟 통의 엽서를 보냈고 두 통의 답장을 받았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엽서는 첫날 호텔에서 보았던 오토바이를 탄 조지아 오키프의 사진 엽서다. 그 엽서는 아까워서 아직 쓰지 않고 남겨 두었다.


- 뉴멕시코 (주립) 미술관 (The New Mexico Museum of Art)


뉴멕시코 컬처 패스라는 걸 구매했다. 뉴멕시코 주립 미술관을 비롯해 1년 동안 15개의 주립 미술관과 박물관, 유적지에 입장할 수 있는 티켓이었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한 장소를 여러 번 방문할 수는 없었다. 처음 미술관을 방문해 패스를 내밀었더니 원주민 후손으로 보이는 장발의 아저씨가 오늘 사용하면 여긴 다시 못 올 테니 나중에 한 번 더 오라며 그냥 안으로 들여보내 주셨다. 꽤 넓은 미술관을 남은 시간 내로 다 둘러보지 못할 걸 아시고 몰래 배려해주신 것이었다. 덕분에 같은 패스로 한 번 더 미술관을 방문할 수 있었다. 매표소 아저씨의 소소한 친절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뉴멕시코 미술관은 산타페가 지금의 명성을 얻는 데 큰 공헌을 한 기관이다. 1917년에 개관한 이래 지역 예술가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오고 있다. 미술관에는 원주민 문화와 뉴멕시코 자연을 담은 작품이 특히 많아서 보기가 좋았다.


- 팰리스 오브 가버너 / 뉴멕시코 역사박물관 (Palace of Governors / New Mexico History Museum)

스페인 제국 시절 뉴멕시코 총독이 거주하는 성으로 설립되었고, 19세기 말까지 쭉 통치자들의 숙소이자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벤허의 작가인 루 월리스(Lewis Wallace)가 한때 뉴멕시코의 주지사로 임명되어 이곳에 머물면서 벤허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집필했다고 한다. 20세기 초 허물어진 건물을 복원해 뉴멕시코 역사박물관으로 개관했다. 정면의 긴 포털에는 원주민 후손들이 수공예품을 만들어 팔고 있다.


-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 (The Cathedral Basilica of St. Francis of Assisi)


푸에블로 스타일로 지어진 주변 건물 사이에서 홀로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지어져 멀리서도 눈에 띄는 성당이다. 19세기 후반 원래 있던 교회를 허물고 새로 지어 올렸다고 한다. 원래는 탑을 훨씬 더 높게 쌓고 싶었지만, 자금이 부족해서 지금의 높이가 되었다고 한다. 왼쪽 탑의 높이가 오른쪽 탑보다 벽돌 하나만큼 더 높다는데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익숙한 유럽풍의 성당 앞에 최초의 원주민 성녀 상이 서 있어서 역시 산타페의 성당이구나 싶었다. 유럽의 성당보다 아담하고 소박해서 나는 더 좋았다.


- 라 폰다 호텔 (La Fonda on Plaza)


1607년 산타페가 건설될 당시 지금의 호텔 자리에 최초의 숙박업소가 함께 지어졌다고 한다. 지금 건물은 20세기 초에 새로 지은 것이지만, 산타페 최초 호텔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한 4성급 고급 호텔이다. 1층에는 레스토랑과 바, 카페, 부티크 숍이 입점해 있어서 호텔에 머물지 않더라도 누구나 둘러볼 수 있다. 겉으로는 소박해 보이는 푸에블로 스타일의 건물 내부가 얼마나 화려해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건물이다. 호텔 빵집에서 자주 빵과 커피를 사 먹었다.


- 카페 파스쿠알스 (Cafe Pasqual's)


산타페에는 맛있는 식당이 많지만, 단 한 끼밖에 먹을 수 없다면 단연코 이 식당을 추천하고 싶다. 멕시칸 음식을 기반으로 이런저런 퓨전 음식을 만드는 곳인데 시켜 본 모든 메뉴가 맛있었다. 처음 먹어 본 몰레(Mole) 소스를 얹은 타말(Tamal)도 맛있었고 디저트로 먹은 수제 초콜릿 케이크까지 훌륭했다. 오전에만 파는 브런치 메뉴도 인기가 많다. 한 가지 단점이라면 문 여는 시간부터 문 닫는 시간까지 항상 손님이 꽉 차 있다는 점이다. 워크인도 가능하지만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하므로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이 식당에서 밥을 먹는 것만으로도 산타페에 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기념품 가게들


산타페 시내에는 대규모 쇼핑센터부터 조그만 노점상까지 정말 많은 기념품 가게가 있다. 사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참느라 애를 먹었지만 예쁜 물건을 발견하고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산타페를 떠나던 날 기념으로 카치나 인형 2개를 구매했다. 카치나는 원주민들이 믿었던 영적인 존재, 혹은 그 존재를 형상화한 손으로 빚은 나무 조각을 의미한다. 카치나의 종류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주변의 동식물(옥수수, 칠리, 호박, 독수리, 올빼미, 곰 등)을 형상화한 카치나, 눈, 비, 절기(동지/하지) 등 계절과 날씨를 형상화한 카치나, 카치나를 돌보는 엄마와 아빠, 할머니 정령도 있고 다른 부족을 형상화한 카치나도 있었다.

마음에 드는 카치나는 너무 비싸서 예산 내에서 고르려니 손가락 크기만 한 인형밖에 살 수가 없었다. 크기는 작지만 섬세해서 마음에 쏙 들었다. 무슨 카치나인지는 까먹고 말았으나, 친구가 "왠지 여름과 겨울의 정령 같아요, "하길래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금요일 저녁의 산타페


해질녘 시내 풍경
카페 파스쿠알 식당 내부
기념품 숍의 풍경들
기념품으로 사온 작은 카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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