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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Y와 닥터 아토믹

by 황경진

남편이 여름 내내 인턴으로 일했던 곳은 프로젝트 Y로 불렸던 로스앨러모스 국가 연구소이다. 2차 세계대전 중 맨해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핵폭탄을 설계하기 위해 지어졌고, 초대 소장을 맡은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필두로 당대 내로라하는 천재 과학자들이 이곳에 모여 인류 최초의 핵폭탄을 만들어냈다. 사막이 많고 인구밀도가 낮은 뉴멕시코는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특히 로스앨러모스는 산중에 숨어 있어 꽤 오랫동안 비밀 도시를 유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로스앨러모스는 산타페에서 북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연구소는 지금도 관련 연구가 계속되고 있어서 경비가 살벌했다. 소총을 든 군인이 정문을 지키고 서 있고 출입증이 있어야만 정문을 통과할 수 있다. 외부인인 나는 남편의 동행하에 공공 도서관과 맞은편 식당에만 들어가 볼 수 있었다. 딱 한 번 식당에서 밥을 먹었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맛이 없어서 그 후로 자주 남편의 도시락을 챙겨 주게 되었다. (이런 목적으로 날 데려간 것인가!) 연구소를 방문하기 전 남편으로부터 신신당부의 말을 들었는데 정문이 보이는 순간부터 절대로 사진을 찍지 말라는 것이었다. 사진을 찍는 시늉이라도 보이면 총을 든 경찰이 달려와 붙잡아 간다 했다. 그런 이유로 연구소에서 찍은 사진은 없다.




산타페에서는 매년 여름 오페라 축제가 열렸다. 오페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서 이번 기회에 입문해 보기로 했다. 그 해의 라인업은 번스타인의 "캔디드", 푸치니의 "나비부인", 로시니의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등 본 적은 없지만 들어 본 적은 많은 유명 오페라들이 포진해 있었다. 그 유명한 오페라들을 제치고 우리가 선택한 작품은 존 애덤스(John Adams)의 "닥터 아토믹(Doctor Atomic)"으로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의 핵폭탄 실험을 소재로 다룬 미국 현대 오페라였다. 다른 작품들은 다음에도 볼 기회가 생길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산타페의 야외극장에서 관람하기에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오페라는 없어 보였다.


닥터 아토믹은 트리니티(Trinity: 핵실험 코드명)라는 인류 최초의 핵폭탄 실험을 소재로 삼았다. 2000년도에 기밀 해제된 핵실험 관련 정부 문서와 프로젝트 참여자들의 인터뷰와 진술, 일기, 편지 등 많은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극을 구성했다. 특히 등장인물의 생생한 목소리를 전달하기 위해 그들이 사용했던 언어를 그대로 대본으로 옮기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당연히 등장인물도 모두 실존 인물이고 스토리에도 과장이나 비약이 거의 없었다.


핵폭탄 실험은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많은 쟁점이 생길 수 있다. 그중 닥터 아토믹이 집중한 부분은 과학자들의 불안과 내적 갈등이었다. 특히 프로젝트를 진두지휘했던 오펜하이머의 고뇌를 깊게 다루고 있다. 오펜하이머는 프로젝트 리더로서 실험을 성공적으로 이끌어야 할 임무가 있지만, 본인조차도 핵실험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확신할 수 없었고 대량 학살 무기를 개발한다는 윤리적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했다.


존 애덤스가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단장으로부터 처음 극을 의뢰받았을 때는 미국판 파우스트를 만들어내는 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오펜하이머를 악마와 거래를 하면서까지 지식욕을 충족시키는 파우스트적 인물로 바라본 것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한 사람의 리더로서, 가장으로서, 그리고 과학자로서 끊임없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인간적인 모습에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결국 존 애덤스는 미국판 파우스트를 만드는 대신 카리스마 있는 리더의 이면에 감춰진 인간적인 고뇌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리브레토 작가인 피터 셀러스(Peter Sellars)는 오펜하이머의 격정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가 자주 곁에 두고 읽었거나 인용한 적 있는 여러 시구를 대본으로 차용했다.




오페라는 핵폭탄 실험을 한 달 앞둔 1945년 6월, 로스앨러모스 연구실을 배경으로 시작된다. 독일이 먼저 핵무기를 개발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속에서 연구에 몰두해왔던 미국 과학자들은 독일이 항복을 선언하자 핵무기 사용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초창기 멤버인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가 핵무기 사용을 반대하는 탄원서를 작성하고 동료들에게 동참할 것을 부탁하자 연구실의 많은 학자들이 이에 동요한다.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와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도 이에 동조하며 오펜하이머에게 조언을 구하지만, 오펜하이머는 정치적인 문제는 전문 정치가가 결정할 일이라며 과학자의 본분에 충실하길 요청한다. 이후 워싱턴 회의에 참석하고 온 오펜하이머는 학자들의 의견과는 상관없이 일본을 대상으로 핵폭탄 투하가 결정되었음을 알린다.


실험 하루 전날 밤, 트리니티 사이트에는 실험용 핵폭탄인 가젯(Gadget)이 높은 탑 위에 설치되어 있다. 포츠담 회담 일정에 맞춰 테스트 일정을 앞당기느라 어수선한 데다가 번개와 강풍을 동반한 폭풍우가 불어닥쳐 불길한 기운을 더한다. 예상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펼쳐지자 기상학자와 과학자들은 당장 실험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오펜하이머조차 어떤 사고가 발생할지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는 전개에 동요하고 만다. 프로젝트 총괄자인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Richard Groves Jr) 장군만이 강경한 태도를 유지한 채 새벽 2시에 다시 기상 회의를 열기로 결정하고, 과학자들이 의도적으로 실험을 망칠 것을 경계해 경비도 강화한다. 홀로 남은 오펜하이머는 마음속에 이는 격정을 폭풍우 치듯 노래한다.


실험 당일 새벽 12시. 폭풍우는 멎을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윌슨은 탑의 꼭대기에 실험 장비를 설치하면서 동료에게 매일 밤 꾸었던 악몽에 관해 이야기한다. 탑의 꼭대기에서 발이 미끄러져 땅으로 서서히 곤두박질치는 꿈이다. 텔러는 핵폭발로 인해 대기가 점화되어 지구 전체가 타버릴 것을 걱정하는 한편, 20억 달러 프로젝트가 점화조차 안 되고 실패할 것에 대한 양가적인 부담감에 젖어 있다. 그로브스 장군은 비가 멎을 것으로 예상되는 새벽 5시 30분에 폭탄을 점화하기로 결정한다.


새벽 5시 10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과학자들은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실험의 성공 여부를 놓고 1달러 내기를 벌인다. 대부분은 실패한다는 쪽에 돈을 걸었다. 오펜하이머는 성공하는 쪽에 걸지만, 폭발력은 얼마 안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로브스 장군조차도 실험에 실패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그로브스 장군은 극도로 긴장한 오펜하이머가 마지막 순간에 실험을 중단시켜버릴까 봐 부하들에게 감시를 철저히 하라고 명령한다.


녹색 로켓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최후의 5분 카운트다운이 시작된다. 기적처럼 비가 멎고 시야가 확보된다. 불안한 선율 속에서 카운트다운이 계속되고 모두가 움직임을 멈춘 채 최후의 순간을 기다린다. 불협화음이 점점 고조되다가 마침내 폭탄이 터진 후 침묵.


불이 꺼지고 캄캄해진 무대. 물을 찾는 일본인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면서 극은 마무리된다.




역사적인 사건과는 별개로 오페라 자체로만 보자면 입문자에게는 너무 어려운 작품이긴 했다. 주제도 무거운 데다 음악도 불편했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무대 연출은 더욱 난해했다. 연출은 리브레토 작가인 피터 셀러스가 직접 참여했다는데, 미니멀한 무대 세팅과 현대 무용을 결합한 안무는 무엇을 상징하는지 잘 읽어낼 수가 없었다. 가사는 알아듣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미리 리브레토를 구해 사전까지 찾아가며 꼼꼼하게 읽어보았지만, 대사에 인용된 보를레르의 시와 Bhagavad Gita(이 사람은 누구인가요?)의 인용문과 John Donne(이 사람은 또 누구?)의 소네트는 몇 번을 읽어도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개발한 것보다 이 시들을 이해했다는 점에서 더 천재처럼 느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보았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현장감 때문이었다. 뉴멕시코에 입성하자마자 우리를 맞았던 살벌했던 폭우와 어마어마한 번개를 여러 번 경험하고 난 후라 그런지 트리니티 실험 직전 불어닥친 폭풍우 속의 긴장감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었다.


역사는 지나고 나면 바위처럼 굳어버려서 그 외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하기가 어려워진다. 핵폭탄도 마찬가지여서 내가 태어났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이 벌어지고 난 후라, 당시 그 시간 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던 불확실성과 혼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해볼 기회가 없었다.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과학자들이 실패할 거라 믿었던 만큼 실패할지도 모르는 수만 가지의 요인이 있었고 실험에서의 성공이 실전에서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도 못했다. 비행기에 폭탄을 싣고 일본까지 날아간 후 목표 지점에 정확하게 폭탄을 터트려야 하는 미션에는 실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많은 실패 요인이 도사리고 있었다. 일어날 수 있었던 수많은 가능성 중에서 결국 이렇게 되었다는 게 한 번 구르기 시작하면 그저 굴러갈 수밖에 없는 운명의 종착역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이 살고 있었을 일본의 도시 2개를 통째로 날려 버린 그 날의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때 그 위력을 전 세계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함으로써 아직 지켜지고 있는 평화도 있다는 게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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