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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감상

by 황경진

산타페에서 가장 유명한 장소 중 하나인 성 프란치스코 성당 옆에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위한 작은 조각 공원이 하나 있었다. 입구도 좁은 데다 다른 건물과 나무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는 공원이었다. 해가 있는 동안에는 늘 열려 있었지만 구석진 곳에 있어서인지 관광객으로 성당이 붐빌 때도 공원은 한산했다.


십자가의 길은 가톨릭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을 기억하며 올리는 기도다. 죽음의 과정을 14개의 그림이나 조각으로 기록하고, 순서대로 이동하며 그 앞에서 기도를 올린다. 13번째의 주제는 모두가 잘 아는 피에타다.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가 성모 마리아의 품에 안기는 모습이다.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성당에 다녔던 나는 벽에 걸린 14개의 패널에 익숙했다. 성당 옆 공원에는 십자가의 길을 기록한 14점의 청동 조각에 더해 "세례자 요한"이라는 작품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래전 대학 동기 한 명이 이탈리아 여행을 다녀온 후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보고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눈물을 쏟았노라 고백했다. 그때 나는 친구의 말이 의아했다. 조각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눈물이 날 수 있을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감정이라 참 궁금했었다. 그래서 몇 년 전 로마를 여행할 기회가 생겼을 때 피에타는 꼭 봐야겠다 싶어 제일 먼저 바티칸 투어를 신청했다.


바티칸을 방문했던 날은 부활절이 막 지난 4월의 화요일이었다. 휴가철도 아니고 주말도 아니니 한산하게 둘러볼 수 있을 거라 믿었던 나의 기대는 시작부터 처참히 무너졌다. 가톨릭 최대 명절인 부활절을 기리기 위해 각지에서 몰려든 군중으로 로마와 바티칸은 이미 몸살을 앓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날은 부활절 내내 닫혀 있던 바티칸 투어가 재개되는 날이기도 했다. 오전 7시부터 광장을 가득 메운 관광객을 보면서 이런 인파는 처음이라며 현지 가이드도 난색을 보였다. 입장도 전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인간 열차에 탑승한 채 지옥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앞사람의 몸에 닿지 않기 위해 두 팔로는 가슴을 감싸 안고, 두 눈으로는 끊임없이 함께 온 일행을 좇았다. 자칫 잘못 휩쓸렸다간 이산가족이 될지도 몰랐다. 물론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바티칸 미술관과 아테네 학당이 그려진 라파엘로의 방과, 그 유명한 천지창조가 그려진 시스티나 채플을 차례로 지나치면서 감탄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감상은 어떤 것도 남아있지 않다. 보긴 봤는데 꿈에서 본 것처럼 기억이 희미하다. "로마에서 볼 것은 사람밖에 없다, " 하셨던 우리 아버지의 말과, 루브르 박물관의 모나리자 앞에서 "그림은 집에 가서 인터넷으로 보시고 여기서는 구경하는 사람들을 구경하세요, " 했던 파리 가이드의 말도 생각났다. 그래. 그림은 인터넷으로 보고 여기서는 사람 구경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몰랐다.


그렇게 사람에 밀리고 치여 마침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앞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뭔가를 더 주의 깊게 둘러볼 만한 체력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도 어떻게 온 곳인데 싶어 마지막 힘을 짜내어 인파를 뚫고 울타리 앞으로 나아갔다. 비로소 피에타를 눈앞에 두고 벅찬 감동이 찾아오기를 기다렸지만 내게 찾아온 것은 전혀 다른 메시지였다. 관광객들의 무자비한 관심 속에 지칠 대로 지친 마리아는 "인제 그만 돌아가 주면 좋겠소. "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마리아의 계시를 받들어 얼른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눈앞에 두고도 실패했던 조각 감상은 뜻밖에도 산타페에서 실현되었다.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은 작품이 있었는데 바로 성당 옆 조각 공원의 "세례자 요한"이었다.


Gib Singleton, "The Baptism of Jesus by John"


이 작품을 조각한 길버트 싱글톤은 "이모셔널 리얼리즘(Emotional Realism)"이라는 말로 본인의 스타일을 설명했다. 말 그대로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슬픔, 체념과 같은 감정들을 작품을 통해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이다. 특히 십자가의 길을 기록한 작품들은 예수의 고통이 온몸으로 뚝뚝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전반적으로 고통스러운 작품들 속에서 유일하게 "세례자 요한"에서는 평온함이 느껴졌다. 물을 떠올리려는 듯 무릎을 굽힌 요한의 손에서는 샘물이 솟아났다. 요한의 어깨에 다정하게 손을 얹은 예수는 그 순간 날아든 새를 보기 위해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예수의 옷은 다 해져서 넝마 조각에 가까웠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몸이 그대로 드러났다. 지금까지 고된 여정이 있었고 앞으로 더 큰 수난이 닥칠 것을 예견하면서도 그 모든 것을 잊고 평화와 안식에 젖어드는 순간이었다.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작품에 스며들어 있다는 게, 조각을 잘 모르는 나도 그 이야기를 쉽게 읽어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예수의 머리 위로 드리운 나뭇잎은 바람이 불 때마다 부드럽게 흔들렸고, 공원에 놀러 온 새들은 요한의 손에 날아들어 목을 축이고 갔다.


이 작품 앞에서는 고해성사를 마친 후처럼 마음이 편안해졌다. 가만히 바라보는 시간이 너무 좋아서 자주 이곳을 찾았다.



내친김에 한 작품 더 소개하고 싶다. 네드라(Nedra Matteucci) 갤러리 정원에 전시되어 있던 “이글 댄서(Eagle Dancer)”라는 조각상이다.


미국 중서부 일대의 원주민 부족들은 독수리를 신성한 동물로 여겼다고 한다. 강한 날개로 하늘과 땅을 오가며 인간을 대신해 신에게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간절한 바람이 있을 때마다 깃털이 달린 옷을 입고 독수리를 흉내 내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춤의 형태를 한 기도이자 간청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날개옷을 입은 소년은 막 독수리로 변해 하늘로 날아갈 것 같기도 했고, 하늘을 날다가 막 땅에 도착한 것 같기도 했다. 독수리가 되어 하늘을 나는 꿈을 꾸는지도 몰랐다. 어떤 간절한 바람을 등에 업고 춤을 추었을까. 허공을 응시한 채 영원히 굳어버린 소년의 꿈이 나는 궁금했다.


나중에 이 작품을 만든 작가, 마이클 나란호(Micheal Naranjo)가 베트남 전쟁에서 시력을 잃고, 온전히 손의 감각과 기억에만 의존해 작품을 빚어냈다는 사실을 알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손으로 만져보라는 안내 문구가 있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나는 조심히 날개를 쓰다듬어 보았다. 햇볕을 받아 따뜻했고, 손으로 수없이 눌러 표면을 매끄럽게 다져낸 작가의 손길이 전해져 눈물이 핑 돌았다.


벅찬 감동은 이렇게 기대치 못한 곳에서 불쑥 찾아왔다.




내친김에 하나 더.

시내를 오가는 길 위에 있어 지날 때마다 눈도장을 찍었더니 어느새 정이 들어 버린 귀여운 여인이다.


Estella Loretto, "Earth Mother",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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