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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범이가 그린 그림

2007

by 황경진

재범이를 생각하면 질량이 아주 커다란 별이 떠오른다.

중력이 너무 커서 주변의 것들을 자꾸 끌어당기는.


일본에서 만난 재범이는 훤칠한 키에 아프로 파마머리를 한, 어쩔 수 없이 눈길이 머무는 청년이었다. 지도를 들여다보며 교정을 헤매고 있던 나에게 "거기 모기 엄청 많은데, 여기로 나오는 게 좋을 걸, " 하고 말을 걸어온 게 내가 기억하는 재범이와의 첫 만남이다.


재범이는 공대생이었지만 미대생만큼 그림을 잘 그렸다. (적어도 그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일본에 오기 전 고작 삼 개월 미술 학원에 다닌 게 다라면서 일본에 온 재범이는 미술 과외로 용돈을 벌었다. 본인을 가르치던 선생님이 타고난 천재라며 감탄했다는 이야기를 무덤덤하게 전하는 아이의 말이 괜한 자랑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긴 철사를 이래저래 구부러뜨려서 만든 조명 기구와 거울의 그림 낙서, 삼분의 일쯤 톱으로 잘린 채 페인트칠이 된 일렉 기타와 곳곳에 널브러진 그림과 음반들. 재범이가 사는 세상은 늘 그런 것들로 가득했다.


우리는 종종 만나 같이 밥을 먹거나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았다. 나는 재범이가 좋았지만 너무 가까이 가지 않기 위해 무단히 애를 썼다. 더 가까이 다가가면 나의 작고 약한 별이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스무세 살의 나는 겁이 많아서 더 멀어지지도 더 가까워지지도 못하는 애매한 거리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 아이를 바라보았다.


재범이는 딱 한번 내 앞에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 거야, 라며 파스텔을 꺼내 들고 눈앞에 있는 화분을 슥슥 그려 나에게 주었다. 10분도 안 되어 완성한 이 그림이 나는 참 좋았다. 7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이보다 나은 그림을 그리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가끔 재범이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할 때가 있다. 허름한 식당에서 밥도 팔고 술도 파는 게 꿈이라고 했는데 그 꿈은 이루었을까.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공원에서 커피를 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건 정말 재범이었을까.


나는 재범이가 자유롭고 아름다워서 좋았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자유롭고 아름답게 살고 있기를.


IMG_20220331_0001.jpg 재범이가 그린 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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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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