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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돈벌러 왔어?"

by 왕씨일기

주변 인간관계를 살펴보면, 공통분모에 속하는 언어가 중국어밖에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생활하고 있는 친척 언니, 대만이나 중국에서 유학을 와 한국어를 아예 할 줄 모르는 학창 시절 친구들, 대학교에 들어가 여러 활동을 통해 만난 다양한 사람들.



그중에는 엄마 아빠들의 친구들도 가끔씩 포함되어 있다. 우리 집에서는 보통 내 손윗사람들에게는 그분들이 한국어와 중국어를 모두 할 줄 아는 경우에도 중국어로 대화를 해야 하는 암묵적인 규칙?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한국어를 할 줄 아시는 경우에도 중국어를 사용해야 하고, 중국어밖에 할 줄 모르시는 분들은 당연히 중국어만 사용해 대화를 한다.



보통은 어머니아버지의 친구분들을 내가 직접적으로 상대할 일은 없지만 한 번 특수했던 상황이 있었다. 그분은 아버지의 친구분이셨는데, 어렸을 때는 한국에서 지내다가 어느 순간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을 하셔서 일본어와 중국어가 메인 언어이시고, 한국어는 아예 못하지는 않지만 완벽한 소통에는 불편함이 있으셨다. 그런 아저씨가 오랜만에 일본에서 놀러 와 우리 집에서 묵으셨었던 적이 있었는데, 일정에 또 다른 볼일이 있으셔서 이튿날에는 서울역으로 가야 하셨다. 그런데 초행길이고 타국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리감이 생겨버린 한국에서 혼자 거기까지 가는 것이 못내 걱정이 되었던 우리 아버지는 나한테 동행을 해줄 것을 부탁했다. 어차피 학교를 가려면 지나가는 길이기도 하고, 아저씨를 어릴 때부터 봐와서 별 부담 없이 수락을 했고 그렇게 전철에서 아저씨와 서서 중국어로 조용히 한담을 나누며 서울역까지 무사히 도착했다.



나름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고 뒤를 도는 순간, 우리가 서있던 곳 근처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혼자 남은 나를 빤히 보면서 말씀하셨다.



"아가씨, 돈 벌러 왔어?"



아, 우리가 하는 중국어를 들으셨구나, 조심하려고 노력했는데. 라는 생각이 번뜻 들었고, 순간 어떻게 나의 상황을 설명할지 당황했다. 갑작스럽게 예기치 않은 공격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 마음을 차분히 하려고 노력하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할머니, 공부하러 왔어요."



완벽한 진실도 완벽한 거짓도 아닌 나의 대답에 만족하셨는지 고개를 다시 돌리시며 우리의 짧은 대화는 끝났다. 어눌하지 않은 나의 완벽한 한국어 발음도 뭔가 할머니에게 어떤 의미의 대답을 해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 칸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받아버려 조금 불편해진 나는 조용히 다음 칸으로 이동을 했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한 것도 아니지만 뭔가 마음속의 불편함을 겪는 순간들은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할머니께서는 별다른 악의도 없으시고 그저 본인의 궁금증을 여쭤본 것이겠지만, 나는 뭔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 들어 조금 부끄럽고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또 그리고 중국어를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포함한 질문과 의문을 일으킨다는 것도 조금 슬픈 마음이 들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만 나는 뭔가 또 보이지 않는 무언가와 싸우고 있다는 기분이 되었다. 만일 내가 다른 언어를 사용했어도 그랬을까? 만일 내가 여성이 아니었으면 할머니께서 그렇게 스스럼없이 질문하셨을까? 중국어를 사용한다는 것, 중국, 그리고 대만 사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 걸까? 하루종일 누구에게도 말 못 할 이런 예민한 질문들을 내 마음속으로만 몇 차례 되뇌었다. 수업이 끝나고 다시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아저씨를 잘 모셔다 드렸냐고 여쭈었을 때에는, 그저 애매한 미소로만 대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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