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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것을 훔친 게 아니라면"

"남의 것을 훔친 게 아니라면 그 무엇도 부끄러워할 것 없어."

by 왕씨일기


우리 외할머니는 내가 살면서 만나본 사람 중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이었다. 중국에서 나고 자라 엄격한 남아선호사상 가문의 맏이로 자란 우리 할머니는, 배움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박탈당하고 오로지 집안 가사 노동과 동생들을 돌보는데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쓰셨다. 그러다 8살이 되던 해에 한국으로 넘어오셨고, 의도치 않게 여러 사건들로 인해 그대로 한국에 쭉 살게 되셨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잣대로만 본다면 배움의 끈이 짧은 우리 할머니는 생을 마감하는 그 순간까지도 글을 쓸 줄도, 읽을 줄도 모르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지금 대학교를 2개나 졸업하고, 현대 사회에서 나름대로 1인분의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보다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현명하신 분이셨다. 필요한 순간들마다 도망치듯 할머니 품 속으로 웅크려 세상 모든 풍파를 피하고자 할 때마다, 할머니는 그때의 나에게 딱 맞는 말만 해주셨다.



"남의 것을 훔친 게 아니라면 그 무엇도 부끄러워할 것 없어."



선천적인 것인지, 후천적으로 길러진 성품인지 항상 수줍음이 많고 자책을 많이 하며 스스로에게 엄격한 나에게 할머니가 해주신 저 말씀은 나의 구원이었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지고 않고 그저 그렇게, 차분하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시며 오랜 가사노동으로 많이 상한 손으로 내 등을 쓸어주셨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이 없다면 그 밖에서는 자유로우라는 할머니의 짧지만 단호한 말이 지금까지의 나의 삶 속에서 나를 몇 번이나 구제해 주었는지.



지금은 내 곁에 없는 할머니이지만 지금까지도, 여전히, 앞으로도 나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존재일 것이다.

더 이상은 힘들 때 파고들 따뜻한 품은 없지만 의지하고 딛고 일어날 현명함의 명맥을 잘 이어나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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