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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규정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국적, 아님 태어난 곳? 그마저도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일까요"

by 왕씨일기

풋풋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 흔히들 그렇듯 열정으로 가득 찼던 나는 수강이 가능한 학점을 모두 가득하게 채워서 일정표를 짰고 그 열정의 피해는 내가 졸업하던 해까지 이어졌었다.


적당히 안고 갈 학점들을 추려내면서 내 자신과 타협하다가도, 도저히 타협이 안 되는 학점을 받은 교양 수업은 "똑같은 일을 두 번 하지 말자"라는 내 나름의 인생 신조를 어기며 재수강을 신청하기로 했다. 그 수업이 바로 문화인류학 수업이었다.


문화인류학에 대해 먼저 간단히 소개를 한다면, 문화인류학이란 인간과 문화에 대해 공부하는 학문으로 의식주와 같은 인간의 기본적 문화부터 사회, 종교 등 인간집단의 사회 및 문화를 조사, 비교 연구함으로써 인류와 사회 문화에 대해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당시 수업 때 무엇을 배웠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수업이 꽤 흥미진진했었다는 점, 그리고 교수님이 미인이시지만 조금 차가우셨던, 멋진 커리어 우먼이셨던 것이 뇌리에 남아 있었다. 새내기 1학년 때 처음 들었다가 돌이킬 수 없는 학점을 하사 받고 2년이 지나 3학년일 때 다시 재수강을 해서 수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교수님은 교수님이 가르치셨던 수많은 학생들 가운데 나를 기억하고 계셨다.


재수강을 하고 몇 번째인지 모를 수업에서 수업이 마치고 천천히 짐을 싸고 나오는 길에 교수님이 내가 있던 자리로 와 말을 거셨다. 몇 년 전에 자기 수업을 듣지 않았냐고. 그렇게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던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너무 놀라 당황해서 말을 더듬으며 대답했다. 그리고 조심스레 여쭤보았다. 어떻게 기억하시느냐고. 교수님께서는 학생분이 화교라서 기억한다고 했다. 그렇게 여러 마디 말을 나누다 교수님께서 물어오셨다.


"학생은 한 인간을 규정하는 게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국적인가요, 아님 태어난 곳? 그렇지 않다면 그마저도 아닌 다른 그 어떤 것인가요."


갑자기 마주한 심오한 질문에 그만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땅에서 끊임없이 내 스스로가 이방인임을 피부로 느끼며 살아온 날들 속에서 아직 가치관이 덜 형성된 어린 시절부터 무수히도 반복해 생각해 왔다. 나는 무엇인가. 나를 지탱하고 세우는 나의 근간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이 답은 이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에 내던져진 지 수년이나 흐른 지금도 나 스스로 안에서 명확히 정립된 답이 없다.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 그 판단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내가 사용하는 언어의 문제일까, 자주 접히는 생활환경의 문제일까, 그도 아니면 내 혈통의 문제일까.


생각이 밀려오는 파도처럼 몰아칠 때는 문득, 내 어린 날 좀 더 순진하고 잔인했던 시절의 타인들이 거칠게 말하며 나의 존재를 밀쳐냈을 때가 떠오른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들. 그런 일방적인 언어적 폭력에 나는 울면서 집에 걸어가면서도 그렇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태어난 곳은 너처럼 이곳 한국인데, 어디로 돌아가라는 거야'. 친숙하지만 타국인 한국, 한 번도 살아본 적도 없지만 단순히 내 국적인 곳의 나라. 무엇이 나를 온전히 대변할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나는 아무 곳에도 속하지 못하고 아무 색도 띄지 못하는 '나'라는 국적을 지닌 투명한 무국적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특별하다는 것, 혼자라는 것. 그건 매우 반짝이면서도 외로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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