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사용하는 언어
우리 집의 공용어는 ‘짬뽕’이다.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다 각각 ‘자기’의 언어를 사용한다. 처녀시절 대만에서 오랜 시간 동안 선생님을 하셨던 어머니는 흔히 '보통말'이라고 하는 표준 중국어를, 화교 2세대인 아버지는 할머니의 출신 고향인 산둥 지역의 사투리를, 한국에서 나고 자란 나와 오빠는 한국어를 주로 사용한다. 또, 무를 자를 듯 중국어와 한국어를 나눠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문장 안에 한국어와 중국어를 섞어서 쓰기도 하며, 또 우리끼리 말하는 ‘화교어’라는 짬뽕식의 언어를 구사하기도 한다.
“마마, 밥 먹었어? 지금 찌띠엔이야(지금 몇 시야)?”
“어 앞에 삥판길 조심해!”
대충 이런 식이다. 또 주변의 화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같은 지역 출신이어도 집에서 쓰는 사투리는 또 달라서 집안마다 같은 상황에서 쓰이는 단어도 문장도 다르고, 서로 쓰는 말을 못 알아듣기까지 한다. 마치 같은 나라의 국경 내에 있어도 각각 독립된 자치국인 것처럼 개별적인 작은 나라들이 모인 것 같은 느낌이다.
엄마와 아빠 중에 한 명만 화교인 집안도 많은 와중에, 부모님 두 분 다 ‘진성’ 화교인 우리 집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댁에도 자주 왕래를 해 산둥어 사투리 중에서도 진또배기로 구수한 말들을 많이 사용했다. 나름 다른 ‘진성’ 화교인 친구들도 알아듣지 못하는 굉장한 수준의 방언이다. 한국어로 치자면 거의 제주도말을 하는 정도일까. 나는 이런 가내 환경의 특수성을 물려받아 내 세대의 화교들 중에서는 그래도 나름 진짜배기 사투리 구사자라는 자부심을 마음속에 은밀히 품어왔다.
집에서 부모님이나 또 친척들이나 이런 우리 집에서만 쓰이는 ‘중국어’, ‘방언’ 등이나 중국어식 농담들이 있다. 이 ‘언어’들은 말 그대로 우리 집에서만 통용된다. 우리 집에는 마치 오랜 연인들의 서로에게만 통하는 해묵은 농담들처럼, 다른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만의 ‘언어’의 조각들이 많이 산재해 있다. 한 번씩 너무 웃겨 친구들에게 공유를 하고 싶어도 각 ‘자치국’들은 각자의 ‘농담’들이 따로 있고, 또 이런 종류의 재밌음은 설명을 하는 순간 재미가 없어 이 즐거움을 나눌 수도 없이 온전히 우리 집안사람들끼리만 향유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다는 안정감과, 다양한 언어로 소통을 하며 우리만 이해하는 농담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웃고 떠드는 순간들이 마치 일상이라는 모래 속에서 건져낸 귀한 사금같이 느껴져 행복감마저 느껴졌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지날수록, 또 집안의 대들보 같은 큰 어른들이 한 두 명씩 먼 길을 떠나시고 남아있는 사람들이 줄어갈수록, 이 ‘언어’들을 향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들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소수 몇 명의 관객만을 위해 존재하는 영화관에서 상영되는 단일 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관객이 한 명씩 사라질 때마다 이 우리 집안의 ‘문화’라고 할 수 있는 어떤 부분들이 시간과 함께 풍화되어 가는 것은 아닐까. 한국에 자리를 잡은 지 세대를 거듭할수록 환경적 요소로 인해서 본국의 언어인 중국어에 대한 감과 실력이 한 세대가 한 세대를 따라잡지 못하고, 한국 반려자를 만나 생을 이어갈 확률이 높은 우리에게, ‘짬뽕’된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 문화의 마지막 계승자는 우리 세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더 많은 시간이 지나 부모님 세대까지 자리를 비우게 되고 영화관의 마지막 관객이 내가 된다면 나는 우리 모든 웃음과 농담과 말장난과 언어를 잇는 유일한 계승자가 되겠지. 나를 풍요롭게 했던 그 모든 순간과 웃음들을 내 세대에서 다 품고 내가 떠나는 순간 모두 소멸되고 영화는 드디어 막을 내리겠지. 슬프지만 이런 일시성들이 지금의 소중함을 더욱 일깨워주는 소중한 장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