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초고/ 완벽한 주차 1.
아파트 단지 입구에 다다르자, 전광판에 '만차'라는 글자가 떠 있다. 분명 전광판에 초록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며 아파트 입구 쪽으로 우회전을 했는데 그새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오름은 입구 앞에서 차를 멈추고 빨간색 배경 속에 있는 '만차'라는 검은색 글씨를 잠시 노려봤다. 전광판 아래쪽에는 '주차 예약 시스템 정상 운영 중'이라고 적혀 있다.
오름은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가 다시 풀었다. 이 시간엔 늘 그랬다. 만차 표시가 떠 있어도, 안으로 들어가면 어딘가 비어 있는 자리가 하나쯤은 있었다. 문제는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차가 주차장 입구 쪽으로 조금 더 다가가자 차단기가 자동으로 올라갔다. 번호판 인식 카메라가 오름의 차를 알아봤고, 이내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알림] 귀하의 주차 가능 시간은 22:40부터입니다. 현재 17분 이른 입차 시도입니다.
오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지하로 내려갔다. 형광등 불빛 아래 주차장은 조용했다. 몇몇 칸은 비어 있었고, 바닥에 그려진 흰색 선이 또렷하게 보였다. 오름은 비어 있는 주차면을 무심히 지나쳤다. 그 위에 표시된 번호는 오름과 무관했다.
시스템이 도입되기 전엔 이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비어 있으면 주차하면 됐다. 이중주차를 했을 경우 전화가 오면 미안하다고 말하고, 자리를 빼 주면 됐다. 이제는 전화가 오지 않는다. 대신 알림이 왔다. 누군가의 얼굴 대신, 기계적인 문자와 숫자가 떴다.
오름은 지하 2층으로 내려간 후 다시 지하 3층으로 내려갔다. 앱은 계속해서 그를 추적하고 있었다. 어디쯤인지, 얼마나 머물렀는지, 예약된 시간보다 몇 분 빠른지. 시스템은 오름이 지금 어떤 사정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알 필요도 없었다.
주차면 하나가 비어 있었다. 오름은 차를 세웠다가, 다시 앞으로 뺐다. 벽에 붙은 표지판에 작은 글씨가 보였다.
22동 1402호 – 22:40~07:00
지금은 22시 23분이었다. 오름은 비상등을 켜고 차에서 내렸다. 지하 주차장은 늘 그랬듯 조용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또 다른 빈자리가 있었다. 그 옆에도, 그 옆에도. 합치면 네 자리쯤은 비어 보였다. 하지만 그 어떤 자리도 지금의 오름에게 허락된 것은 아니었다.
뒤에서 경적 소리가 났다. 누군가 내려오고 있었다. 오름은 다시 차에 올라탔다. 비상등을 끄고 천천히 움직였다. 어디에도 세울 수 없는 차가 주차장을 배회하고 있었다.
그때 관리사무소 직원이 보였다. 형광 조끼를 입고, 한 손에 무전기를 들고 있었다. 오름과 눈이 마주치자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이런 상황을 이미 여러 번 봐왔다는 사람처럼.
“자리 없죠?” 오름이 말했다.
직원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있는 것 같긴 한데요.”
직원은 잠시 주차장을 둘러봤다. 비어 있는 자리들, 번호, 표시등. 직원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리는 있어요.” 잠깐의 침묵 후 직원이 말을 이었다. “근데 쓸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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