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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팸트리 Jun 25. 2019

퇴계 이황의 넓은 마음과 깊은 뜻

진성이씨, 퇴계 이황의 처가 가일!

퇴계 이황의 넓은 마음과 깊은 뜻

진성이씨, 퇴계 이황의 처가 가일!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3533783&cid=47317&categoryId=47317

퇴계는 1521년 김해 허씨 시중공 유전의 후손인 진사 김찬의 딸 허씨와 결혼했다. 허씨는 두 아들[준, 채]을 낳았으며 차남 채가 태어난 지 한 달 만인 1527년에 세상을 떠났다.

퇴계 이황은 안동 풍산면 가일에서 대대로 살아온 명문 권씨댁을 출입했다. 가일의 권씨는 안동권씨 복야공파의 한 갈래로 풍산면 가곡동에 500년을 세거해온 안동의 명문이다. 영달을 탐하지 않는 맑은 기풍이 있으며 문한이 연면하고 구국충정이 뜨거웠다. 가일에 인물이 많지만 그 중에서 화산 권주가 가일을 크게 빛낸 인물이다. 18세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김용석, 신종호, 강백진, 남효온, 강응정, 박연 등과 함께 향약계를 만들어 매월 초하루에 모여 [소학]을 강론했다. 1481년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대마도 경차관으로 길을 떠났다. 그 때 홍귀달, 이승건, 김감, 박의영, 조지서, 신용개, 김전, 이자견, 송질 등이 이별을 아쉬워하며 읊은 시들이 전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보, 유자온, 홍귀손, 이창수, 송함, 강중진, 유세미, 이 창윤, 신응윤 등과 지은 시들이 경향 각지에서 애송되었다. 1489년 공조정랑을 거쳐 응교로 있을 때 성종이 승하하여 그 시책문과 행장을 지었다. 그뒤 직제학 우부승지를 거쳐 예조참판과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1504년 성종비 윤씨가 사사될 때 화산이 주서로 사약을 들고 갔다는 죄목으로 연산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화산 권주의 맏아들 권질은 아버지가 화를 입음에 이어 본인에게도 화가 겹쳤다. 연산군의 폭정을 비난하는 궁중 투서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을 죄인의 자손들이 한 짓이라 하여 그 혐의로 그가 체포되어 국문을 받고 거제도로 유배를 갔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1517년 광흥창 봉사에 올랐다. 1521년 안처겸이 심정, 남곤 등의 숙청과 경명군의 추대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처형될 때 권질이  안처겸과 친한 사이라 하여 예안으로 유배되었다. 


권질이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퇴계 이황이 찾아 갔다. 


권질은 퇴계에게 물었다.

"경호, 자네는  상처를 하고 난 후 속현을 하였는가?"


속현이란 부인이 죽은 후 다시 혼인하는 것을 뜻한다.


퇴계는 대답했다. 

"아직 하지 않았습니다." 


권질은 몹시 괴로운 표정을 하고 말문을 다시 열었다. 

"내 집 사정을 누구보다 자네가 더 잘 알 것일세. 겹으로 화를 당한 터이라 내 여식이 그만 혼이 나가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네. 아무리 생각해봐도 자네밖에는 믿고 맡길 사람이 없네. 부디 가엾은 내 딸을 거두어 이 가문에 맺힌 한을 자네가 풀어주게나."


퇴계는 난감했다. 그집 사정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집이 두 번의 환란으로 쑥대밭이 되고 딸마져 실성하여 "숙맥"행세를 한다는 것도 소문으로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학덕으로 빛나는 그 집을 마음 속 깊이 존경하며 흠모의 정을 갖고 있던 터라 그 청을 퇴계가 내칠 수 없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거한 저에게 따님을 맡기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저의 집 어른들께 아뢰어 승낙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경호! 정말 고마워."


퇴계는 두 번째 부인으로 권씨를 맞아들였다. 재혼을 한 뒤  몇년 만에 퇴계는 문과에 급제하여 서울 서소문동 근처에 집을 얻어 생활을 했다. 권씨 부인은 소문에 듣던 대로 정신질환이 심했다. 제사에 쓸 음식을 정성스레 모셔 놓은 곳에 가 여러 어른들 앞에서 그냥 집어 먹는 등 무례한 짓의 연발이었다. 급히 조정에 입고 나갈 도포를 빨간 헝겁으로 기워 주위를 경악케도 했다. 퇴계는 그런 부인을 한 번도 나무란 적이 없었다. 집안 사람들이 비웃을 때도 언제나 부인을 감싸며 사랑했다. 


1545년 권씨 부인의 부친 권질이 귀양에서 풀려 나와 병으로 고생하다 1547년 별세했다. 친정 부친 권질이 죽고 난 뒤 7개월 만에 퇴계 부인 권씨도 아버지 따라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권씨 부인을 16년 동안 한결같이 사랑했다. 권씨 부인은 정신이 오락가락했으나 넓은 생각 깊은 뜻으로 감싸 안아주는 남편의 가이 없는 사랑을 한껏 누리다가 퇴계의 곁을 떠났다. 소생마져 남기지 못한 채 퇴계의 큰 사랑만을 가슴에 안고 표표히 저승으로 갔다.


권질의 부친 화산 권주가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권주의 부인 이씨는 자결했다. 퇴계의 장인 권질은  평해로 귀양가고 권질의 딸은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권질의 동생 권전[퇴계 처숙부]은 정암 조광조와 함께 덕치주의를 창도하다가 기묘사화의 여파로 장살의 참화를 입었으며 권전의 아내는 종으로 끌려 갔다. 이와 같이 퇴계의 처가는 참혹한 화를 당했지만 퇴계의 아내 사랑은 헛되지 않아 퇴계의 처가 가일 권씨는 풍산평야 기름진 벌판에서 500년을 두고 그 아름다운 학덕의 명성을 날려 퇴계에게 보답했다. 

사화로 인해 참혹한 희생을 당한 가일 권씨 퇴계 처가는 유훈에 의해 벼슬길에 나가지 않다가 화산의 5대손 권박이 당시 석학인 가음 신집에게 글을 배워 문과에 급제하고 그 조카 권선이 또한 문과에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권박의 손자에 이르러 안동의 제갈량이라 불리는 병곡 권구가 배출되었다. 영남 학파의 종장으로 추앙되는 갈암 이현일이 일찍 그의 학문을 사랑하여 그의 손녀를 권구의 아내가 되게 하였다. 권구는 갈암의 문인이 되어 갈암의 아들 석학 밀암 이재와 교유하고 학문 연구에 정진하여 경사와 성리는 물론 천문, 지리, 의약, 복서, 병법, 음률에 이르기까지 두루 통해 영남에 그 명망이 매우 높았다. 안동에 사림의 우러름을 받는 창설 권두경도 "병곡은 나이는 젊으나 공부는 늙었으니 우리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다."하였다.


병곡의 아들 진, 집, 보가 모두 학행이 있고 진의 아들 명우 상우, 명우 후손 준, 집의 5대손 준하 모두가 글하는 선비들이다. 준하 손자 오설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신사상연구회에 참여하고 신사상연구회의 후신인 화요회 대표로 조선노동연맹의 중앙위원이 되었다. 그뒤 중국 등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10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옥사했다. 보의 현손 익,  익의 아들 준희, 준희 아들 동만, 보의 증손 장, 장의 아들 도, 도의 아들 준일, 도의 동생 찬, 찬의 조카 준호, 박의 조카 회의 후손 환, 박의 동생 정의 후손 서, 경 그리고 훤의 아들 익, 익의 아들 치, 박의 숙부 덕행 후손 준헌 준덕 형제가 모두 글 잘하는 선비들이다. 


그 중 익의 아들 준희는 찬의 맏아들로 백부 익의 후로 입양계대하였다. 익이 평의 양자로 들어가  준희는 수곡 보의 5대 주손이 되었다. 가일 부호 준희는 채기중, 박상진이 이끄는 대한광복단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전 재산을 거의 다 바치다 싶이했다. 이 일이 왜경에 발각되어 공주 형무소에 수감되고 15년 구형을 받았다. 70 노령이 참작되어 1년의 옥고를 치르고 특사되었다. 익의 아들 준희, 준하 손자 권오설 이외에도 독립투사가 가일에서 많이 배출되었다. 만주 장고봉 전투에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죽은 부자 동직과 오창, 준희 손자 오상, 숙의 증손자 오운 등이 가일의 이름을 빛냈다. 


이들은 모두 퇴계의 학문을 숭상한 영남의 선비들이다. 이들의 가슴 속에는 가일의 가엾은 처녀를 한없이 사랑해준 퇴계의 인품을 흠모하며 퇴계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겨 퇴계의 이름을 빛냈다. 퇴계는 한겨례의 큰 스승이기 전에 가일의 안동권씨 문중이 400년을 두고 한결같이 아끼고 자랑스러워한 문객 이서방이다. 지금도 가일 사람들은 영남의 어느 누구보다 퇴계를 더 사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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