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우리 동네에 소문난 크레페 맛집이 있어서요.
최근 며칠간 저녁을 안 먹었어요. 간헐적 단식을 다시 시작했죠. 먹는 거 좋아하는 저에겐 가혹한 형벌이죠. 노화일까요? 식탐일까요? 늘 소화불량에 시달려요. 약을 먹으면 좋아지고요. 좋아지면, 또 과식하고요. 더 이상 젊지 않은데, 옛날 생각만 하고 처먹어대는 거죠. 받아들여야죠. 늙어가는 몸뚱이는, 저녁 식사가 따로 필요 없다는 걸요. 적게 먹거나, 굶어도 큰 지장 없다는 걸요. 제가 뭘 알겠어요. 귀도 얇아서 유튜브에서 하라는 건, 다 해봐요. 욕하지 말아 주세요. 저라고 휘둘리고 싶겠어요? 아프니까, 갱년기다. 귀가 얇아질 수밖에요. 효과를 봤다는 사람들 말을 어떻게 무시하나요? 의사, 약사가 추천해 주는데, 그런 말도 무시해야 하나요? 그래서 저녁은 안 먹었어요. 힘들죠. 괴롭죠. 그래도 아침이 가볍더라고요. 오래간만에 위장도 꼬르륵 소리를 내고요. 위장이 꼬르륵할 때마다, 음악을 틀어요. 신나는 음악에 맞춰서 춤을 잠깐 쳐줍니다. 기쁘니까요. 자축합니다. 저에겐 꼬르륵꼬르륵 젊은 위장들이 제일 샘나요.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사람, 매 끼니가 배고파서 먹는 사람. 미치게 부러워요. 재수 없어요, 정말.
우리 동네에 줄 서는 크레페 집이 있어요. 외진 곳에 있는데도 늘 사람이 있어요. 크레페 가게를 지나칩니다. 호기심이 발동합니다. 참아야죠. 포장지에 주인아주머니 사진까지 딱 박혀 있어요. 무슨 자신감인 거죠? 저만 모르고, 전국구로 알려진 곳일까요? 먹어도 밀가루 범벅, 설탕 범벅은 아니죠. 채소를 먹고, 밥을 먹어야죠. 이 늦은 밤에 미쳤나고요? 휴우. 이거 하나가 뭐라고, 가게 앞에서 발길을 돌리고, 또 돌립니다. 에잇, 먹자. 위장은 꼬르륵 소리도 안 내는데, 왜 이리 먹고 싶을까요? 속이 다 쓰려요. 위산이 콸콸 쏟아지네요. 먹고 싶어서일까요? 먹지 말라는 경고일까요? 나약하고 나약한 위장만 해병대에 좀 보내고 싶어요. 내가 너에게 못해준 게 뭐니?
일본 과자 센베라고 아시나요? 우리나라에서도 트럭에서 무게로 재서 팔잖아요. 그중에 가장 기본적인 맛있죠? 크레페 반죽이 센베 과자 느낌네요. 엄청 바삭하더라고요. 이 바삭함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았구먼. 저는 맛살,치즈에 마요네즈가 올라간 근본 없는 크레페를 골라요. 우리 프랑스, 우리 크레페는 이렇지 않은데 말이죠. 훨씬 부들부들, 달달하죠. 누뗄라로 짓이겨진 프랑스 크레페가 살짝 생각나는 밤이군요. 제 몸은 허락하지 않았어요. 속이 쓰린 건 위장의 분명한 경고죠. 탈탈 털어 먹고 나니까, 밤이 무서워요. 잠잠했던 위산이 다시 역류해서, 목 끝을 태울까 봐요. 역류성 식도염 안 겪어본 사람은 몰라요. 위가 뜯어진 것 같고요. 위산이 뜯어진 위장으로 용암처럼 뜨겁게, 거북이 속도감으로 지져대죠. 꼭 새벽에 찾아와요. 악몽도 졸아서 자취를 감춘 새벽에요. 역류된 위산이 스릴러 영화처럼 음산하게 치밀어 오르고, 옥죌 때의 공포. 모르실 거예요. 모르고 사셨으면, 큰 복인 줄 알고 오늘 밤 치킨이랄도 시키시든가요.
저는 아령을 들어요. 운동이죠. 뭐. 태워야죠. 먹은 만큼요. 위장에게 최대한 부담을 덜 줄 수 있도록요. 천 개. 아령을 새처럼 파닥파닥. 날갯짓 천 개를 하기로 합니다. 백 개를 하고 나니까요. 후회가 밀려드네요. 후회할 걸 알았잖아. 그래도 처먹었잖아. 후회는 무슨. 그래요. 후회할 자격도 없죠. 나른해요. 자고 싶어요. 아뇨. 아뇨. 구백 개 마저 해야죠. 셀프 과식을 했으니, 셀프 형벌도 줘야죠. 네, 벌입니다. 괴로워야죠. 숨을 헐떡일 자격도 없죠. 삼백 개. 더는 못 하겠습니다. 생각보다 속도 덜 부대끼는데요. 자도 될 것 같아요. 무슨 소리. 벌을 받는 주제에. 셀프 협상을 하고 자빠졌어? 사백 개. 에휴. 정말 부럽습니다. 잘 먹고, 잘 싸는 사람들요. 제 탓이죠. 유전적으로는 하등 문제가 없을 거예요. 이런 위장은 저만 가지고 있어요. 부모님, 형, 사돈의 팔촌, 그 누구도 잘 먹고, 잘 싸더라고요. 예민한 건지, 짐승만도 못한 식탐인 건지. 어쨌든 제 탓 맞습니다. 그러니까, 벌 받아야죠. 사백 구십, 사백 구십 일.
오백
아이고, 이러다 죽겠습니다. 사랍 잡겠어요. 밥 막 먹고 운동하는 거 아니라면서요. 의학적으로 검증됐나요? 달밤에 체조하면, 위장병 나은 경우 보셨나요? 오백 개면 할 만큼 했어요. 너도 좀 작작해. 공범 주제에, 왜 정색하고 닦달이야, 이 나쁜 새끼야. 자아는 열심히 분열해서, 서로 물어뜯는군요. 내 자아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끝내렵니다. 오백 개를 하고, 위산이 역류하면 위산 새끼도 양심 없는 거죠. 할 만큼 했어요. 늙을 만큼 늙었고요. 중요한 건 크레페는 맛있었어요. 무릅쓰고서라도 즐기고 싶었다. 이 감정을 기억해야 해요. 쾌락의 가치를 명심해야죠. 분명 행복했습니다. 위태롭게, 영롱하게 반짝였죠. 반짝였으면 됐어요. 오늘도 잘 살았다고요. 이만 자겠습니다. 반짝반짝 영롱 영롱 글쟁이는, 좋은 꿈을 꿀 겁니다.
PS 매일 글을 씁니다. 작은 오체투지입니다. 글로 여러분, 여러분께 다가가는 중입니다. 어딜 도망가시나요? 제가 매일 책을 도서관에 신청해 달라. 책 좀 사달라. 이런 말로 마무리하는데요. 오늘은 쉴게요. 그래야 읽는 분들도 오잉 이 놈이 또 왜 이러지? 짠해져서 더 알아서 잘해주실 거니까요. 잔머리를 두 번 굴렸어요. 다, 크레페 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