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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 달토끼 Nov 06. 2020

오늘은 아버님을 이겨보겠습니다.

그들의 경쟁이 시작되었다_걷는 사람들

<건강관리 어플로 보는 일주일간 걸음수 순위>



 

"어머, 가족들이 다들 날씬하시네."

라는 말을 어딜 가든 들었었던 적이 있다.

"나는 살이 안 쪄서 걱정이야. 몸에 힘이 없어."

라고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자랑반 걱정 반 하고 다닌 적도 많다.


 그래서 벌을 받았나 보다. 뱃살이 찌기 시작하는데 세상에 이렇게 빨리 불어날 수 있는 건지, 나는 이번 주에도 바지 쇼핑을 했다. 확찐자 유머가 한창 돌 때 콧방귀 뀌며 웃고 말았었는데, 그게 내 얘기가 되었다. 그새 1인치가 또 늘어나서 입을만한 바지가 있어야 말이지. 그런데 이게 내 얘기만이 아니라 우리는 다 같이 동글이 가족이 되고 있다. 윗도리야 단추를 잠그지만 않으면 그냥 입을 수 있으니까 참고, 바지만 주기적으로 사게 되는데 지출이 꽤 크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며 나는 챙이 큰 모자를 샀다. 동네 산책이라도 해보려는데 가을볕이 너무 뜨거웠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본 남편은 힘내라며 서프라이즈 선물로 스마트워치를 사줬다. 내가 스스로 운동하는 모습을 처음 봐서 기특해서 사줬단다. 다음 날부터 동네 호숫가를 열심히 돌았다. 그러다 보니 같은 시간에 운동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나만 빼고 핸드폰 가방이 있었다. 그날 난 핸드폰 가방을 샀다. 음, 이래서 운동은 장비빨이라 했던가? 바지 값 아끼려 운동 시작했는데 이렇게 돈을 많이 쓸 줄이야.


 내 스마트 워치가 생기고, 요즘 우리 가족 그룹 채팅방에서는 다 같이 걸음 수 경쟁이 한창이다. 사실 처음 경쟁을 부추긴 것은 나다. 건강 어플에서 모든 가족을 일부러 친구추가 시키고는 내 높은 걸음 수 순위판을 캡처해 매일같이 채팅방에 올렸더니 가족들이 하나, 둘 집에 있던 스마트 워치를 차곤 걷기 시작했다.

  "미리 죄송합니다. 오늘은 아버님을 제치겠습니다."

라고 남편은 아침마다 으름장을 놓는다. 그러면 비웃듯이 남동생은

  "거기~ 아래 공기는 어때요? 어우 여긴 상쾌하네!"

그러는데 약 올라서 화가 날 것 같다. 동생은 걷기 운동을 전혀 하지도 않고, 병아리 신입사원이라 운동할 시간도 없는데 매일 1위다. 차이도 많이 나서 한 번도 이겨본 사람이 없다. 회사에서 하루 종일 스마트워치 차고는 팔을 흔들며 몸부림이라도 치고 있는 것인지. 본인 말로는 모르는 것 있을 때마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물어보러 돌아다니는 게 꽤 되는 것 같다고 한다. 그래, 첫 사회생활인데 무진장 힘들겠지.


 며칠 전, 어김없이 건강관리 어플을 확인하며 침대에서 일어났는데 내가 꼴찌가 되어 있었다.


1위. 남동생

2위. 아빠

3위. 남편

4위. 엄마

5위. 나


아무리 새로고침을 해도 변함없다. '아, 그 많은 장비들이 무슨 소용이던가. 분명 내가 부동의 2위였는데 어찌 된 일인가.' 그날부터는 약이 올라서 내가 먼저 어플을 캡처해 올리지 않는다. 더 놀라운 것은 엄마가 매일 꼴찌였는데, 밖에 나가지도 않는 엄마가 내 위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엄마가 베이스네. 그렇지, 엄마는 꼴찌를 지켜야지."

라고 매일같이 놀렸었는데...


 그 날 친정에 가서 관찰해보니 엄마는 집에서 스마트워치를 차고 걸으며 묵주를 들고 계셨다. 묵주기도가 끝난 다음에는 기도서를 들고 돌아다니셨다. 하루 종일 그렇게 남모르게 조용히 집안을 걷고 계셨다. 가족들이 꼴찌라고 놀리면 엄마는 장난으로 화가 난 모습의 이모티콘을 보내곤 했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이 대결에서 이기고 싶은 욕망이 가슴 한편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엄마가 하도 운동을 안 하고 집에만 있어서 운동하게 하려고 놀린 건데 효과가 베리 굳이었다.


 아빠는 안 그래도 맨몸 운동을 10년 넘게 열심히 하셨다. 그중에는 국민체조, 팔 굽혀 펴기 등이 있는데 출장을 가서도 안 하신 적이 없단다. 걷기 경쟁이 시작된 후로는 매일 아파트 다섯 바퀴씩 돌고 오신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우리 아빠는 그 후로는 단 하루도 걷기 운동을 빼먹은 적이 없다. 퇴근 후 의자에서 말뚝잠을 주무시다가도 시간이 되면 벌떡 일어나 나가신다. 아마 눈이 오기 시작하면 우산이라도 들고나가실 것이다. 남편과 아빠의 경쟁이 제일 치열한데 아침저녁으로 둘의 순위가 계속 바뀔 정도이다. 평생 본 우리 아빠의 성격이라면 아무도 이길 수 없을 텐데, 이 대결의 끝이 기대가 된다.


 남편은 불편하다며 안차던 스마트워치도 찾아서 다시 차고, 여름엔 더워서 못 걸어 다녔던 회사를 다시 매일 걸어간다. 단지 아빠를 이기겠다는 목표 하나지만 건강에 좋은 일이니 적극적으로 격려해주고 있다. 어제는 남편이 채팅창에서 아빠 순위가 더 높은 것을 보고는,

"저 조만간 마라톤 나갑니다. 두고 보시죠."

하던데, 술에 취해 한 얘기라 진심인지는 모르겠다. 혹시 모르지, 내년에 가족 모두 단련돼서 같이 마라톤대회를 나가게 될지도.


 이 대결이 시작되고 몸에 좋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살이 빠지지는 않았어도 근육이 붙고 있는 게 느껴지고, 기분도 상쾌하고 좋다.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서 '헥헥'소리가 절로 났는데, 오래 걸을 수 있는 힘이 생긴 것을 며칠 전 여행에서 확인했다. 우리 가족 모두가 같이 건강해지는 법을 찾은 것 같아서 좋다.


 열심히 걸어서 마라톤 그거 우리도 나가봅시다. 코로나 종결되면 산티아고 순례길도 걸어봅시다.

평생 건강하며 같이 걸어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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