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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민희 Jan 29. 2022

서울로 향하는 지하철에서 나는 악마가 되었다

아무리 착하게 살아보려 해 봐도

고3 때까지는 지하철을 타는 게 너무 좋았다. 지하철을 탄다는 건 안산을 벗어나 서울로 간다는 뜻이었으니까. 지하철을 타는 날은 특별한 날, 재미있는 일이 생기는 날이었다. 값도 저렴한데 서울 어디든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지하철이 너무 좋았다. 게다가 4호선 종점 근처에 사는 특혜로 언제나 앉아서 갈 수 있으니 내게 필요한 건 시간뿐이었다. 매일 만나도 할 말이 넘쳐흐르는 친구들과 함께라면 세 시간이라고 못 버틸까? 어쩌다 한 번씩 지하철을 탈 때마다 나는 즐거웠다.


그때 지갑에 꼭 갖고 있던 게 지하철 노선도다. 양 옆으로 접어 작은 카드만 한 크기가 되는 지하철 노선도를 어디서든 구해서 노선도 뒷면은 좋아하는 잡지 이미지를 붙이고, 그걸 또 박스테이프로 코팅을 해서 늘 지갑에 넣어 다녔다. 지하철을 탈 때는 물론이고 평소에도 그 종이를 열어서 꽤 자주 들여다봤다. 1호선을 탈 때는 금정에서 갈아타고, 2호선을 탈 때는 사당에서 갈아탄다는 평생 가도 잊을 수 없는 정보도 이때 익혔다.


대학에 간 이후로 지하철은 즐거움보다 고통을 주는 존재가 됐다. 어쩌다 한 번씩 타는 것과 매일 타는 건 차원이 달랐다. 어디를 가도 한 시간을 넘게 가야 하는데 앉지 못한다면? 하루를 망친 거라고 보면 된다. 4호선 상행선을 타는 사람이라면 자리가 나는 걸 노려 볼만한 구간이 있다. 고잔역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탑승할 때 바로 승부를 봐야 한다. 타자마자 자리에 앉지 못했다면 70%의 확률로 목적지까지 내내 서서 갈 확률이 크다. 아주 작은 기대라도 버릴 수는 없는 법. 상록수에서 착석을 노려볼 수 있겠으나 사실 여기에선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훨씬 많다. 여기까지 못 앉았으면 금정까지는 쭉 서서 간다고 보면 된다. 금정은 황금 환승 구역이 없다. 보통 환승역은 몇 번 칸에 타면 가장 빨리 갈아탈 수 있는지 정해져 있는데 금정은 1-1부터 10-4까지 통 환승 구간이다. 그래서 금정에서는 기대하지 못했던 곳에서 자리가 나기도 한다. 고잔에서 금정까지 서서 왔는데 자리가 생겨 앉았다면 그날은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세상에 긍정적인 에너지를 뿜고 다녀야 마땅한 날이다. 그런데 이건 금정에서 내릴 사람을 잘 뽑는 운 때로는 능력에 좌우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안양역에 갈 것 같은 사람, 가산으로 출근하는 사람을 뽑는 촉! 그런 촉을 지녔다면 마땅히 금정에서는 앉을 자격이 있다. 하지만 금정에서도 보통 내리는 사람보다 타는 사람이 더 많다.


금정에서도 못 앉았다면 정말 큰일 났다. 이후로 상황은 더욱 나빠질 것이다. 오전 7시부터 9시 사이의 출근 시간대라면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겠지. 정말 악랄하기로 유명한 9호선이나 2호선 지옥 구간(신도림-강남)보다 4호선은 전반적으로 양호한 편이나, 이른 아침 시간에는 역시 별도리가 없다. 수도권 사람들은 일제히 서울로, 서울로 향한다. 금정부터 사당까지는 정말 내리는 사람 하나 없고 타는 사람만 가득하다. 가끔 혼자 밸런스 게임을 하곤 했다. 어디에 사는 게 더 좋을까 선택하는 건데 '앉아서 갈 확률 높은 고잔 vs 지옥을 30분만 버티면 되는 범계'가 주제다. 하나하나 조건을 따져보자면 밸런스가 하나도 맞지 않지만(당연히 범계가 백번 낫지) 그냥 저런 거라도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수밖에. 5일이면 3~4일은 앉고 하루 못 앉는 거니까, 오늘만 참자, 하면서.


지하철을 타면 탈수록 악마가 되어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누가 서있든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다. 진짜 자느라 몰랐던 날도 있지만, 아닐 때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갈수록 뻔뻔해져서 눈을 뜨고도 모른 척하는 날도 있었다. 출근을 하던 어느 날에는 내 앞에 진짜 임산부가 섰다. 그때는 도저히 모른 척할 수 없어서 자리를 양보했는데, 내 태도는 결코 좋지 않았다. 그렇게 오만상을 찌푸리고 서있을 거면 차라리 자리를 양보하지 않는 게 나았을 정도로. 그분은 한대앞 정도에서 타서 서울역쯤 내렸다. 그분에 내린 자리에 고작 두 정거장 후에 내릴 거면서 굳이 앉아 또 얼굴을 구겼다. 하필 내 앞에 선 그분을 탓하던 나, 자리를 내주고도 있는 힘껏 짜증을 내던 나, 그 새까만 기운이 아직도 생생하다. 5년은 넘은 일인데도 그때를 떠올리며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과오가 좀 덮이려나. 아닐 것 같다.


도시인이 자주 쌀쌀맞고 배려심이 없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서울과 수도권을 사방으로 잇는 직행버스에서,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우리는 모두 날카롭고 예민할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나이스 하기로 소문난 김 대리도, 친구들 사이에서 늘 웃음 짓는 대학생도 하루 일과의 10분의 1 이상을 보내는 교통수단 내에서는 좋은 사람이기 쉽지 않다. 일상적으로 부담 없이 타고, 누군가에게 자리도 양보하고, 너무 앉아만 있었다 싶은 날에는 스스로 서있기를 택할 수 있을 정도의 지하철 탑승 시간은 최대 30분인 것 같다. 30분 정도면 악마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하철을 탈 수 있다.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고 난 후에야 겨우 깨달았다. 오늘도 435㎜의 좌석 한 칸을 차지하기 위해 눈치 게임을 하는 사람들, 앞에 선 노약자를 보고 무거운 마음으로 갈등하는 지하철 동지들에게 위로를 전한다.




Photo by jaemin don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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